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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훈은 상쾌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오랫동안 수면제 없이는 잠들 수 없는 나날이었지만 약을 찾지 않은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갔다. 딱히 생활패턴이 바뀐 건 아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때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었을 뿐. 오늘도 어김없이 성훈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들었다.
-수진 씨~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문자를 보낸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짧고 간결한 문자 하나가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성훈은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라고 혼잣말을 하며 가뿐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속에 잠들어 있던 까만 봄베이 고양이가 빼꼼히 나와 성훈과 함께 쭉 기지개를 켰다. 호박색 바탕에 까만 눈동자가 성훈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음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매일 그 눈빛에 반해 성훈은 손을 뻗어 고양이의 얼굴에 손을 비볐다. 잠시 그의 손길을 느끼던 고양이는 강아지처럼 배를 보이며 '가르릉'거렸다.
까만 퓨마 새끼를 닮은 '봄이'와 함께 한국에 들어온 지도 이제 5개월. 고양이와 독거노인이 살기에는 꽤나 넓은 평수의 아파트였다. 둘 다 연애도 못하고 이대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까? 올해 47세인 성훈은 자신을 독거노인이라 칭했다. 뭔가 억울함이 밀려와 6살 고양이에게도 독거 고양이라고 부르는 그였다.
성훈은 거실로 나와 물 한 잔을 마시고 어제저녁 수진이 문자로 추천해 준 곡을 플레이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나오는 여인의 음성에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나 멀리 떠나가네> 라 왈리에 나오는 아리아. 수진은 이 음악을 성훈에게 추천해 주면서 곡의 배경도 함께 들려주었다.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원치 않는 사람과의 결혼을 강요당해 결국 고향을 떠나기로 한 왈리의 처연함을 노래한 것이라고... 곡이 후반부로 흐르면서 풍부한 성량의 고음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성훈은 식탁의자에 앉아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머릿속으로는 수진을 그려보았다.
4개월 전쯤 음악 감상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곡을 추천하고 들으면서 감상평을 공유하는 공간. 30명가량 되는 사람들 중에서 수진은 단연 눈에 띄었다. 음악을 듣고 좋다 싫다의 표현이 대부분이 었던 대화방에서 수진이 올리는 감상평은 매력적인 한 편의 소설 같았다.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클래식과 오페라를 공유할 때면 글의 깊이는 더했다. 성훈 역시 같은 장르를 좋아하긴 했지만 수진만큼 배경지식이 넓지는 않았기에 배움의 자세로 그녀의 음악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렸다. 한 달쯤 되었을까? 수진이 개인 톡으로 연락처를 물어왔을 때 내심 놀라면서도 반가웠던 자신을 떠올리며 성훈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날부터 성훈과 수진은 음악모임과는 별개로 좋아하는 음악을 나누었다. 하루는 성훈이 그다음 날은 수진이... 수진은 음악 전공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함께 성장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런 면이 성훈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궁금증이 싹을 틔우고 점점 자라나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벽이 성훈과 수진 사이에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음악과 관련해서는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그녀는 유난히 개인사에 대한 질문을 하면 뚝뚝 끊어지는 답변을 보내왔으니 말이다. 덕분에 그는 가시를 피해 장미에게 다가가는 손길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훈이 겨우 알게 된 사실이라고는 40대 초반의 독신, 언니와 단둘이 살고 있으며 몸이 좋지 않아 지금은 일을 쉬고 있다는 것 그 정도였다.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면 좀 더 나을지도 몰라.' 성훈은 수진이 추천해 준 음악을 다 듣기도 전에 수진에게 용기를 내어 문자 하나를 전송했다.
- 수진 씨 지역도 멀지 않은데~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수진 씨 좋아하시는 '앙상블 디토' 앨범 드리고 싶은데... 시간 어떠세요?-
만나고 싶다는 말에 놀란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그녀는 답장이 없었다. 아침과 점심, 오후 일과를 마무리할 때까지 울리지 않는 까만 액정을 몇 번이나 성훈은 터치해봤다. '뭔가 바쁜 일이 있을 거야.' '혹시 아픈 건 아닐까?' 내심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만 깊어졌다. 짧은 답변이라도 한 번도 빠짐없이 자신의 문자에 답을 해주던 수진 아니었던가?
성훈은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이 5번쯤 울렸을까? 처음 듣는 여자의 음성이 핸드폰을 통해 귓가를 울렸다. 수진의 목소리는 그가 상상했던 대로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 여보세요. 수진 씨? 하루 종일 답장을 기다렸는데... 혹시 제가 잘못한 걸까 해서..."
"아~ 아니에요. 몸이 좋지 않아서..."
"약은 드셨어요?"
"네~ 저 좀 더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녀의 목소리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끊겨 버린 차가운 휴대폰을 들고 잠시 멍하게 있던 성훈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말 그녀는 아팠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를 쉬게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잘 자라는 문자 대신 마음으로 그녀의 건강이 빨리 회복하기를 빌었다. 며칠 편안한 밤을 보내던 성훈은 그날 오랜만에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아침에 되어서야 수진에게 문자를 보내었다.
-수진 씨~ 어제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많이 당황했죠?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음악과 관련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잖아요. 수진 씨를 통해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어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처럼 편하게 대화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수진 씨가 편할 때 꼭 한번 뵙고 인사를 나누고 싶어요. 저 독거노인이긴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늦어도 답장은 꼭 해요. 기다리겠음.)-
아침에 성훈이 보냈던 문자에 답은 저녁 무렵 도착했다. 하루 종일 우울했던 그의 기분을 수진의 문자 한 통이 상쇄시켰다.
- 성훈 씨~ 돌아오는 토요일 오전 10시에 그 카페에서 뵙기로 해요. 음...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성훈의 시계 초침은 시침이 된 듯 느리게 흘러갔다. 반면 수진의 시간은 있지도 않는 손바닥에 땀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수진이 약속한 토요일이 되었다.
그녀가 그를... 그가 그녀를... 과연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까...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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