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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Feb 11. 2021

가을비 그리고 만남.

https://brunch.co.kr/@uriol9l/158


밤새 가을비가 찝찝하게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침이면 그쳤으면 좋겠는데... 제발.' 밤새 잠을 설친 수진은 창문 앞에 서서 빗물을 따라 눈동자를 아래로 떨구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산을 들 수 있다면 비가 오든 말든 상관이 없었겠지만 수진의 경우는 예외였다. 평소처럼 우비를 입고 카페에 들어가는 모습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성훈을 만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수진은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말랐다. 


며칠 전 성훈에게 만나자고 했던 문자는 수진이 보낸 것이 아니었다. 수진이 약에 취해 잠들었을 때 울렸던 전화를 미진이 받으려다 끊겼다. 동생의 휴대전화를 가만히 내려놓으려다 호기심에 성훈의 문자를 발견한 것이 문제였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눈치챈 미진은 수진이 덮은 이불을 확 젖혔다.


"수진아. 일어나 봐. 할 말 있어."

"왜~ 언니. 나 좀 더 자고 싶어. 좀 나가주면 안 될까?"

"정말 미안한데... 네 폰에 전화가 왔는데 끊겼어. 있지~ 나 성훈 씨 문자를 봤어."

"뭐라고?"


미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익숙한 이름에 수진은 벌떡 몸을 세웠다. 몽롱했던 정신이 거짓말처럼 또렷해졌다. 


"미안해. 일부러 보려고 했던 건 아냐. 그런데 수진아~ 그 사람 만나보는 거 어때? 너 너무 사람 안 만났잖아. 사고 나고 이성은 만난 적도 없고... 응? 언니 소원이야."

"이 꼴로 어딜 나가라는 건데... 그 사람은 나 이런 몸인 거 몰라. 온라인상에서만 대화 나눴는걸?"

"그 사람이 너의 겉모습을 보고 실망한다면 나쁜 사람인 거지. 하지만 왠지 그러지 않을 것 같아. 너 불편하면 내가 보낼게. 보낸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하고 있는 수진을 보며 미진은 수진 대신 성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성훈 씨~ 돌아오는 토요일 오전 10시에 그 카페에서 뵙기로 해요. 음....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평생 미진은 수진의 손을 잃게 했다는 죄책감에 수진에게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 널뛰기하는 수진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주기만 했던 미진의 행동은 신속하고 단호했다. 이 상황이 수진은 당황스러웠지만 곧 고요해진 눈으로 미진을 바라보았다. 이미 미진이 전송한 메시지는 성훈이 확인했을 것이고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은 언니가 메시지를 보냈어요.'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수진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를 만나기로... 


낮과 밤은 충실하게 흘렀다. 약속된 토요일 새벽, 눈치 없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수진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을 매년 기다렸다. 옷이 얇아지는 계절에도 긴팔을 입었던 수진에게 두꺼운 옷은 방패와도 같았으니까... 성훈을 만나기 위해 골라놓은 옷 역시 소매 부분이 다른 옷보다 조금 더 길고 뭉툭했다. 멀리서 보면 수진은 추워서 코트 안으로 주먹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창문을 바라보던 수진은 뭉툭한 손목이 뻘겋게 부풀어 오르도록 긁어댔다. 환상 통은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무리했을 때 다행스럽게도 가을비는 이슬비가 되어 흩날렸다. 미진은 수진의 약속 장소까지 동행하겠노라고 우겼지만 수진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성훈의 만남이 이성을 만나는 마지막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수진은 약속시간보다 1시간 전 카페에 도착하여 가장 안쪽 창가 벽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는 카페에는 온통 새것의 향이 가득했지만 조용한 피아노 음악이 부드럽게 공간을 희석하는 느낌이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 내부는 약간 어두웠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치 음악을 따라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수진은 긴장하지 않기 위해 촛불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등에서 땀이 흐르고 힐끔힐끔 문을 보느라 수진은 현기증이 올라왔다. 


9시 45분. 카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수진은 단번에 그가 성훈임을 알아차렸다. 한 번도 사진을 교환한 적이 없었지만 여자의 감으로 알 수 있었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와인색 니트가 잘 어울리는 하얀 피부가 눈부셨다. 흑갈색 웨이브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안경 콧날을 스쳤다. 멀리서 보아도 커다란 오른손이 머리를 대충 넘기더니 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수진이 성훈을 단번에 알아본 것처럼 그 역시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진 씨죠? 일찍 나오셨네요. 제가 기다리고 싶었는데... 한성훈입니다." 악수를 청하는 성훈의 동작에 수진은 허둥지둥 놀라 일어날뻔했다. 

"아~ 악수는 좀 그런데... 죄송해요. 앉으세요." 수진의 떨리는 목소리에 성훈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차 안 시키셨죠? 뭐 드시겠어요? 따뜻한 차?"

"저는 레몬에이드요. 스트롱도 부탁드릴게요."


찬바람이 부는 날 시원한 에이드라니... 수진의 의외의 메뉴 선정에 성훈은 놀랐지만 이내 음료를 주문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주문을 하고 카운터에서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성훈은 잠깐잠깐 수진을 훔쳐보았다. 몸을 일으켜봐야 160이 안 될 것 같은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인지 까만 머리가 얼굴 위로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성훈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것처럼 수수한 소녀 같았다. 신기하기도 어디 하나 떼가 묻지 않은 청초함이 그녀의 음성에서도 배어 나왔다. 다만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커다란 옷이 그녀를 더 왜소해 보이게 만들었다.


"여기 있어요. 많이 찰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레모네이드에 빨대를 꼽아 수진 앞에 놓으며 성훈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 저는 괜찮아요. 사실 굉장히 오랜만에 누구를 만나는 거라서 많이 떨리네요."

"저도 한국 와서 거의 사람을 못 만나고 지냈네요. 하하~ 그래도 수진 씨랑 음악 이야기하면서 힐링했죠. 모르는 사람이 보자고 해서 망설였을 텐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하고요."

"궁금했어요. 어떤 분인지...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고요. 너무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성훈은 궁금했다. 지난번 수진이 보낸 문자에서도 놀라지 말라고 했는데... 그때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단어의 조합을 수진이 되풀이해서 말하자 성훈은 저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다. 등이 바로 선 그를 바라보며 수진은 천천히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아주 잠시 수진은 사고가 나기 전 자신의 양손을 떠올렸다. '앙증맞은 두 손으로 에이드 잔을 들고 마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처럼 금세 손가락 마디마디에 차가움이 전해졌다. 이 역시 환상통일 텐데 생각하며 수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수진의 두 손이 올라오는 순간 성훈은 잠시 얼어붙었다. 머그잔을 들고 커피를 마시던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수진은 놓치지 않았다. 성훈은 한참을 수진의 양 손목을 바라보다 그제야 '놀라지 말라'라는 수진의 말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래서 성훈이 수진을 처음에 만나자고 했을 때 망설였구나 싶었다. 


"음... 언제..."

"20대 초에 교통사고가... 성훈 씨 많이 놀라셨죠?"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많이 아팠겠어요. 혹시 지금도 아픈가요?"

"손은 안 아파요. 다만 마음이 자꾸 손을 재생시켜서 아플 뿐이죠. 미안해요. 처음부터 말하지 못해서... 사실 만나게 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어요."


수진의 말을 마지막으로 성훈은 한동안 말을 못 했고 수진 역시 물끄러미 식어가는 그의 커피만 바라보았다. 잠시 올려다 본 그의 눈빛은 심연 속을 걷는 듯 보였다. 언뜻 서글프게도 느껴졌다. 오랜 침묵을 깨뜨린 건 수진이었다. 


"성훈 씨. 우리 그만 일어날까요?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일어서려는 그녀를 성훈이 붙잡았다.

"미안해요. 잠시 생각을 하느라... 수진 씨의 용기에 놀랐어요. 저 보러 나오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 저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줄래요?"

일어서려던 수진은 다시 포근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런 이야기 어떻게 들으실지는 모르겠는데... 수진 씨가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니 저도 이야기할게요. 

하아...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캐나다에서 10년을 만났습니다. 연애를 길게 하고 싶어서 결혼을 미루고 미뤘어요. 그 친구가 클래식과 오페라를 좋아해서 저도 따라 좋아하게 되었죠."

"아~ 네" 수진은 성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작년 이맘때 즈음이었네요. 퇴근하고 저를 만나러 오던 길에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에 뛰어갔을 때는 이미 오른쪽 다리가 절단되어 있었죠. 그때는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하아... 의식이 없었어요. 3개월을 매일 그 친구 곁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깨어나서 없는 다리를 보면 얼마나 놀랄까. 나를 만나러 오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나를 원망하지는 않을까' 두려웠어요. 제 두려움을 알아차리기도 한 건지 그 친구는 그렇게 떠나버렸죠."

"아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성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있었다.


"저는 참 이기적이게도 그 친구가 없어진 다리를 확인하지 않고 떠나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요. 무용을 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죠. 그 친구에게 미안하고 미안하고 또 미안했어요. 캐나다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더라고요. 그 친구가 키웠던 고양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고 그 후 알게 된 사람이 수진 씨예요."


어느덧 빗줄기는 다시 굵어져 창문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서로의 눈에 빗물이 어렸다. 빗장이 열린 심장의 떨림은 오래도록 가실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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