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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30. 2020

감정의 주파수를 맞추세요.

직업병으로 청력이 약해진 내가 할 수 있었던 일.

"농심 새우깡이요~"

"농심 새우깡 말씀이십니까?"

".... 네"

"고객님 농심 새우깡은 지역 상호로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혹시 경기도 쪽 농심 대표번호로 연결해 드릴까요?"

"엇? ㅎㅎㅎ 아니요 아가씨~ 재미있네!! 농심 새우깡 아니고 동신 체육관이요!!"


아뿔싸!!      


번호 안내원 7년에 이어 S사로 이직 도합 10년!! 다다다 자판기 치는 소리. 귀에 꽈악 끼는 해드셋. 듀얼 모니터를 보며 바쁘게 움직이는 눈동자. 하루 1000통이 넘는 전화 안내를 하는 일을 내가 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었다. 


그 시절 가장 싫어했던 개그맨은 김영철~"사랑합니다. 고객님. 엽때요~~~" 개그 소재로는 훌륭했을지 모르겠지만 장난전화도 많았다.


"사랑합니다."이 멘트에 많은 남자들이 "저도요." "얼마만큼요?" "사랑하면 만나주세요." "잘래??"부터 세상에는 이렇게 이. 상. 한. 수컷들이 많다는 걸 알게 해준 고마운(?) 직장 생활이었다. 스트레스도 무진장 받았지만 그래도 학교생활보다는 나았으니까 묵묵히 버텼다. 내가 고장 나기 전까지는...


부스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열심히 하는데 양쪽 귀에서 웅~~ 이러다 말겠지라며 며칠을 평상시 대로 일을 했다. 서두에 적은(실화) 고객의 목소리를 잘못 듣는 일이 한 번 두 번 횟수를 늘려가더니 옆에서 선배들이 하는 이야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듣기가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후두염이 같이 오면서 목소리도 더 이상 나오지 않고 강제 병가 시작!!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언니들이 말했었는데... 귀랑 목 관리 잘하라고~~에효..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청력검사와 목검사가 이어졌다. 이미 마음이 지하 10층까지 내려가 있는 내게 의사는 친절하게 이야기해준다.


"청력이 많이 안 좋네요. 그리고 목은 이대로 나두면 목소리를 잃게 될지도 몰라요. 관리 잘하셔야 해요." 병원을 못 믿겠다. 유명 한의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다.

"아가씨. 지금 목 상태가 70대 할머니 목이랑 비슷해요. 귀도 안 좋네 일단 치료를 해봅시다."


'이러려고 배운 수화가 아니었는데...ㅠㅠ 너무 나를 혹사를 시켰나 보다.' 그 후 휴가를 몰아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다행히 예전 목소리의 80%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 상태는 예전의 50%? 온전히 상대방의 말에 집중하지 않으면 가끔 나는 잘못 알아듣고 이상한 대답을 늘어놓았다.ㅠㅠ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상대방의 말에 200배 귀 기울이라고 이렇게 된 거겠지. 대화할 때는 온전히 집중하자. 집중~~'


한편으로 평소 일하면서 건성건성 했던 나를 돌아봤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딴짓을 했던 나의 태도~(안내하면서 낙서에 십자수를 하니 이리되지..ㅡㅡ;;)  그런 태도는 버려야 했다. 사람을 만나서 대화할 때는 좀 더 나았으나 문제는 통화. 놓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메모만이 살 길이다. 통화할 때는 무조건 내 앞에 노트와 필기구를 두었다. 


들으면서 중요 단어를 적어 두는 것. 그것은 몇 번이고 상대방에게 "다시 말씀해주시겠어요?"라는 말을 줄이게 해주었다. 통화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습관을 만들기까지 한참이 걸렷다.


일을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하면서 이젠 70% 정도 들을 수 있지만 지금도 통화를 하면서 다른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상대방이 말한 단어가 왜곡되어 내 귀에 꽂히기도 한다. 그럴 때면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으로 들으려고 한다. 목소리 톤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오프라인 만남보다 zoom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1대1 통화나 대화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한꺼번에 많은 사람의 음성이 섞이면 200배는 집중을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헛소리를 할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다. 독서토론이나 그룹미팅에서 긴장한 나머지 등에는 촉촉히 땀에 젖어들었다.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의 미팅시간이 끝이 났다.  옆에 a4용지 4장 분량의 작은 글씨들을 보면서 '엄청 집중했구나. 애썼다 정말"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한분 한분의 말 속에 차이가 나지만 따뜻함은 귀로 듣는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임을 더 느낀다. 감정에 주파수를 맞추면 설령 내가 못알아 들었을 지라도 당황하지 않고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청력이 안좋은 걸 예전엔 숨기려고 했다. 이제는 "너 왜 이리 못알아 들어."라는 말을 듣기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솔직함'이 상대와 나의 주파수를 맞추는 첫단계인것처럼... 내가 먼저 부탁하면 상대는 나를 배려해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나와 통화를 나눈 많은 분들에게 오늘의 글을 통해서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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