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많이 내린다고 했던 기상청의 예보가 빗나간 겨울이었다. tv에서는 연일 우한 폐렴이 메인 뉴스로 보도되었으나 나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 유행했던 사스나 메르스처럼 가볍게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그 바이러스가 한국에 온다 한들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는 내 믿음은 기상청 예보만큼이나 잘못된 것이었다. 우한 폐렴이 코로나 19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했을 때에도 반년이 넘도록 갇힌 생활을 할 줄 누가 알았으랴.
코로나 창궐하기 전, 작년 가을부터 나는 온라인 모임에 참여했다.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를 입학하면 내 개인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내 성장을 위해 작은 여유시간마저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판단하에 여기저기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다. 모임이 점점 확장되면서 올해 초 "공대생의 심야 서재"라는 모임을 통해 그녀를 처음 만났다. "꽃이 꾸는 꿈"이라는 뜻의 닉네임을 쓰는 그녀는 우한 폐렴 때문에 아이들과 친정집으로 피난? 을 왔다는 소개로 문우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녀를 만나기 전 몇 개월 동안 온라인 모임을 통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익명성이라는 때문일까? 혹은 가벼운 관계라 생각했던 걸까? 휙 돌아서 버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헛헛해졌다. 어쩌면 그녀도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참 끈덕진 사람이었다.
모임을 이끌면서 한 명 한 명에게 나누어 주는 인사와 쾌활한 웃음, 그 안에 전해지는 정이 좋았다. 모임 안에서만 그녀를 만났다면 나는 밝고 푸른 달의 앞면만을 보았을지 모른다. 달의 뒷면 그 어두운 민낯은 그녀의 글 속에서 드러났다. '아... 그녀가 이런 삶을 살아왔구나. 얼마나 속을 끓이며 눈물을 흘렸을까?' 아픔을 관통한 사람은 상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나 보다. 그녀의 아픔이 내게 그러했다.
"향님의 글은 참 따뜻해요. 아직 마흔도 안되었는데 이렇게 아픈 경험을 많이 했을까요? 놀라기도 하고 그래요. 글 계속 쓰시면 정말 잘 쓰실 거예요."
어쩌면 이 말이 내게 그저 입에 발린 칭찬이었을지 몰라도 내게 글을 쓸 용기를 주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의 장점들... 이를테면 자신을 관리하며 무슨 일이든 당당하게 앞장서는 모습, 성실함, 작은 실수의 인간미까지도 사람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에세이 합평 마지막 날 역시 그랬다. 시작도 하기 전에 큰아이를 한국에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마음이 읽혀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엄마, 아내, 딸이라는 공통분모로 더 가까워 짐을 느꼈다. 설사 그 감정이 나 혼자 느낀 것이라 해도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겨졌다.
더 이상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으로 만나보고 잠깐이나마 만나보고 싶었다. 서울로 올라가려 2~3번의 시도에도 확산되는 바이러스는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속절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유난히 길어지던 여름 장마의 막바지에 그녀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언젠가 간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더 늦춰지면 혹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봐 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내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9월 3일 목요일 4시 비행기로 그녀는 한국을 떠나갔다. 출국 전 목소리를 들으면 울컥할 것 같아 몇 번이고 핸드폰 화면을 on, off 했다. 모임 속에서 울고 웃으며 쌓인 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없으면 먼 사람이고 멀리 있어도 마음이 있으면 가까운 사람이라 했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는 거리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우리의 거리가 한국에 있을 때 기차로 2시간이었다면 비행기로 2시간만큼 더해졌을 뿐이다. 설령 그녀를 중국이 아닌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었어도 마음만은 가깝다고 느끼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우리니까...
그녀가 한국을 떠나고 카톡으로 전송된 사진 한 장. 비행기 안에서 본 중국은 촉촉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꾹 참았던 눈물이 빗물처럼 조용히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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