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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Apr 01. 2021

"그 이불 내가 털었소"

아빠에게 배운 부부의 사랑

유난히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 탓이었을까? '왠지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커튼을 여는 손등 위로 내리쬐는 볕이 마치 팅커벨이 뿌리는 마법가루처럼 느껴졌다.


침대 위에 침구를 대충 정리하고 방문을 열었을 때 어김없이 주방에서는 엄마가 분주하게 아침을 준비 중 이셨다. 아빠는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그제인지 어제인지 모를 영자 신문을 보고 계셨고 동생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소파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강아지 두 마리가 내 인기척에 '착착 착착~' 나를 향해 뛰어오는 동안 아빠께는 신문에 눈을 고정한 채 네게 물으셨다.


"혹시 거실에 둔 아빠 꺼 카세트 봤니? 어제 분명히 이쪽에 둔 것 같은데..."

"잘 찾아봐요. 어딘가 있겠지." 아빠의 질문에 엄마가 먼저 주방에서 대답하셨다.

"아뇨. 저는 못 봤어요. 오늘은 유난히 기분 좋은 아침이네~ 내 새끼들 잘 잤소?" 

나는 강아지 두 마리에게 뽀뽀를 해주고 욕실로 들어갔다. 교복을 갈아입고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대충 빗어 넘기며 식탁에 앉았다. 그제야 멀대만 한 동생이 폭탄머리를 하고 작은방에서 기어 나왔다.


"씻기 전에 밥부터 먹어. 너 또 늦게 잤어?"

"오늘은 누나 먼저 가. 나 바로 준비하고 나갈게."


아침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마께서 무슨 일로 과일과 토스트를 만드셨는지 나는 의아했다. '밥이면 어떻고 토스트 면 어떠랴'. 버터 향이 나는 식빵, 그 안에 치즈, 파와 당근이 송송 들어가 있는 계란부침에 딸기잼. 환상의 조합이었다. 하나만 먹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손은 벌써 토스트 하나가 더 들고 가방을 챙겼다.


"저 먼저 나가요. 다녀오겠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안에 사람이 없기를 바랐다.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면 그날은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던 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맘때 술 취한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나서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빨간색 화살표가 9층에 멈췄을 때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앗싸. 3 연타~ 숙면에 토스트도 맛있었고 엘리베이터에서도 혼자 탄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라인 문을 통과했다. 매화꽃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잠시 멈춰 화단에 핀 꽃을 보다 쓱 고개를 돌렸는데 익숙한 물건이 눈에 꽂혔다. 망가진 카세트가 이제 막 돋아난 잡초와 잔디 위에는 배를 벌리고 워있었다. 순간 카세트와 테이프, 이어폰은 배에서 빠져나온 장기들처럼 보였다. 정말 아빠의 카세트인가 싶어 화단으로 들어가 손으로 그것을 들어보았다. 틀림없는... 그 카세트가 맞았다.


'아뿔싸 큰일 났다. 어쩌지?' 일단 지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이어폰으로 카세트의 벌어진 배를 돌돌 말아 가방 앞주머니에 넣었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어떻게 교실까지 도착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빠의 망가진 카세트를 책상에 올려놓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아빠께서 몇 년을 아껴 쓰던 카세트였다. 공테이프로 녹음한 자료들을 듣고 또 들으며 강연을 준비하셨기에 나는 이 녀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왜 이 카세트가 이른 아침 화단에 덜 부러져 있었냐는 것이었다. '엄마께서 이불을 털다 떨어진 걸까?' 합리적 의심은 엄마를 향했지만 집에 갈 때까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침에 둥실둥실 떠올랐던 기분은 연자 맷돌을 몸에 달고 바다에 뛰어든 것처럼 심해로 빠져들어갔다. 전열 테이프로 돌돌 말려져 있는 이어폰의 끝자락이... 아빠의 손때가 묻어있는 카세트 버튼이... 수업 시간에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내 마음을 짓눌렀다. 마치 내가 이 카세트를 망가뜨린 범죄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네. 정말 못 봤니?"

"..." 


하교한 나를 보고 아빠가 물으셨을 때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망가진 카세트를 꺼내놓았다. 아빠는 할 말을 잊으신 건지 카세트만 이리저리 살펴보셨다. 혹시나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에이~ 안 되겠네"라는 말씀에 역시나 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이불 털다가 같이 털었나 보다. 저번도 한번 리모컨 털었는데..."

"아~ 역시나 엄마가~ 아빠 화 안 났어요?"

"화나기보다는 좀 어이가 없네. 엄마에겐 내가 말할 테니 걱정 말고..."


아끼던 물건이 망가졌으니 화를 내실만도 한데 아빠의 담담한 반응에 내가 더 눈이 동그레 졌다. 엄마가 퇴근하고 저녁식사 시간에도 아빠는 카세트에 대한 언급이 없으셨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 부부 싸움을 하시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늦은 시간에도 안방엔 적막만 흘렀다. 그리고 며칠 뒤 못 보던 cd플레이어가 아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엄마 그때 엄마가 이불 털면서 아빠 카세트 같이 털어버렸죠?"

"언제? 기억 안 나는데..."

"아니. 내가 아파트 화단에서 아빠 망가진 카세트 가져온 거 아빠가 이야기 안 했어요?"

"아~ 그거 아빠가 털어버린 거 아니었어? 아빤 나한테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렇게 마음 졸였었는데 아빠는 자신이 했다고 엄마 말씀하셨구나.'  내 학창 시절 직장맘이었던 엄마는 여유가 1도 없으셨다. 늘 바빴지만 가족들의 아침을 꼭 챙겼던 엄마.

'그날 엄마는 일어나자마자 정신없이 이불을 털었겠지. 그리고 주방에서 맛있는 토스트를 만들었어. 그래 그랬어.' 나는 엄마의 뒷모습에 익숙한 딸이었다. 아빠는 이런 엄마가 안쓰러웠을까? 아빠의 '사랑해'는 어쩌면 '내가 이불을 털었소' 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저녁 두 분이 나 대화가 궁금해졌다.


친정집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 벚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왠지 오늘 이 꽃잎들이 부모님의 마음에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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