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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r 29. 2021

아빠 목소리.

한번 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우... 우리 소온자 밥은 머겄나?"

" 네 할아버지^^ 왼손 움직여 보세요 이렇게..." 

              

하루에 한 번 아이는 친정 아빠와 영상통화를 한다. 할 때마다 잊지 않고 아이는 자신의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카메라에 손을 들이민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이는 웃으며 "이제 잘 움직여요 할아버지 리모컨 잡아서 보여주세요~"라며 극한 감동의 목소리를 낸다. 아이를 따라 살짝 움직였던 아빠의 왼손이 살며시 내려간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음성은 "우.. 리 소온자 최거."로 마무리되는 그런 짧은 통화.


"엄마, 할아버지 손에 좋은 음식이 뭘까요?"

"글쎄~ 검색창에 쳐볼까?"

"할아버지 손에 좋은 거 정말 찾고 싶은데..."

"엄마도 그래. 엄마도 할아버지 손이 예전처럼 움직 이실 수 있다면 좋겠어. 할아버지 목소리도..."




학창 시절 바쁜 아빠를 가장 오래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강연장이었다. 뇌색남이었던 아빠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줬던 건 화려한 언변도 제스처도 아니었다. 청중을 몰입하게 만드는 힘은 목소리. 성우처럼 마이크를 타고 흐르는 음성에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아빠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아빠를 보며 이상형은 아빠처럼 목소리가 좋고 강연을 잘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주말이면 아빠는 기체로 알아보지도 못할 원고 5~6장을 내게 휙 던져주며 타이핑을 부탁하셨다. 친구들과 놀고 싶었지만 나는 아빠에게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사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내가 정리한 원고에 아빠 목소리가 겹치는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늘 행복했으니까... 비록 항상 바쁘셔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진 못했지만 아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어깨가 올라갔었다.


뇌경색 이후 한쪽이 마비되고 언어능력도 현저히 나빠진 지 벌써 2년이 가까워오고 있다. 건강했던 모습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과 천천히 타협했고 그동안 가족들은 아빠 곁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아빠는 얼마나 더 힘드셨을까? 며칠 전 아이와 함께 친정집에 갔을 때 아빠는 내가 타이핑했던 원고들을 정리 중이셨다. 이제는 다시 연단에 오를 일도 원고를 부탁할 일도 없을 거라며, 이걸 다 수정하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꺼내셨다. 코끝이 찡해서 나는 아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냐 아빠 점점 나아지실 거예요. 그리고 아빠가 좋아하시는 공부 더 하실 수 있어요. 아빠 영어도 중국어도 너무 잘하셨잖아요."

"... "


원고를 정리하던 오른손이 잠깐 멈추었다가 분주하게 다시 움직였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뒤돌아 방을 나오면서 나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빠 그 원고 버리실 거면 저 주세요. 제가 보관할 거예요."


지금에 와서 가장 후회되는 건 강연하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많이 담지 못한 것과 녹음을 하지 못한 일이다. 아빠의 강연을 녹음했던 테이프들은 엄마가 다 정리하신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제 예전에 아빠께서 강연하셨던 모습과 목소리는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가끔 꿈속에서 연단에 오른 아빠를 만난다. 따뜻하고 온화했지만 자신감이 넘쳤던 그 목소리. 다음날 일어나 흥건한 베개를 보며 꿈속에서 울었다는 걸 깨닫는다. 

'보고 싶다. 듣고 싶다. 그립고 그리워진다' 

내 마음을 아는지 하루 종일 봄비가 슬프게 내리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순간을 돌아본다.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를...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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