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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Apr 05. 2021

수용소 담에 핀 꽃 한 송이.

- 나의 취향을 보여주는 책 -


그날 저녁이 되자, 랄레는 몹시 침울한 기분으로 혼자서 터벅터벅 비르케나우로 돌아간다. 옆에서 무언가가 그의 눈길을 끈다. 색을 가진 무언가, 꽃이다. 꽃 한 송이가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가운데는 새까맣고 그 주위를 핏빛 꽃잎들이 감싸고 있다. 그는 주위에 누가 있는지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하지만 꽃이 있다. 그는 언제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줄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 본다. 기타와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 그러나 그들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그를 집어삼키려 한다. 과연 두 사람이 만날 수 있을까? 젊은 기타가 연륜 있는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배울 날이 올까? 어머니도 나처럼 기타를 반기고 사랑해 줄까?'


그는 어머니를 상대로 연애의 기술을 배우고 연습했다. 틀림없이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무엇이 통하고 무엇이 통하지 않는지 터득했고, 이를 통해 남녀 사이에 무엇이 적절한 행동이고 무엇이 부적절한 행동인지 재빨리 파악했다. 젊은 남성들은 모두 자신의 어머니를 상대로 이런 학습 과정을 거쳤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누구나 그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몇몇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 그들은 펄쩍 뛰며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구슬리기가 더 쉽지 않으냐고 다시 물으면 그들은 모두 연애할 때 할 법한 행동을 몇 번은 했다고 시인했다. 단, 그들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편해서 어머니를 택했다고 생각했다. 랄레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감정 교류는 랄레가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모든 여자에게 끌렸다.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그랬다.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다. 여자를 치켜세워주는 것도 좋았다. 그에게는 모든 여성이 아름다워 보였고 그렇게 말해준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의 여동생도 알게 모르게 여자가 남자에게 무얼 원하는지 랄레에게 가르쳐주었고, 지금까지 그는 두 사람에게서 배운 것을 늘 잊지 않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늘 배려해야 해, 랄레, 작은 것들을 기억하면 큰 것들은 저절로 이뤄질 거야.”


어머니는 달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그 짧은 꽃줄기를 조심스레 꺾는다. 내일 기타에게 어떻게든 건네줄 생각이다. 방으로 돌아온 랄레는 그 소중한 꽃을 침대 옆에 살며시 놓아두고 꿈 없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꽃잎들이 검은 심지 주위에 말린 채로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끝까지 버티는 건 죽음뿐이군."


- 아우슈비츠의 문신가 - 헤더 모리스


- 줄거리 -


1942년 어느 날 24세의 유대인 랄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그곳에서 수용자들에게 문신을 새기는 일을 맡게 된다. 오직 생존을 위해서 동료이자 같은 민족인 희생자의 팔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잉크로 유대인의 대학살 상징을 남긴다. 문신을 새기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첫눈에 반한 수용자 번호 4562번. 극한 상황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그녀를 지키기 위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 이 책을 고른 이유 -


표지에 붉은 장미가 그려진 책을 집어 들었다. 중간 즈음에 접어놓은 페이지를 펴서 읽어 내려갔다. 이 내용의 앞부분은 절망적이다. 수용소에서 악명이 높았던 '요제프 멩겔레'라는 의사가 주인공의 동료를 강제로 끌고 가려한다. 그것은 '죽음'을 뜻하는 행동이었기에 주인공은 상황을 막으려 하지만 의사는 그에게 소총을 겨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가 마주한 것은 작은 꽃 한 송이. 그는 수용소에 있다는 생각도 잊고서 어머니와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떠올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을 완독 하는 데 이틀이 걸렸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슬픔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도망치려고 발버둥 치지만 현실은 지옥 같은 수용소. 나였다면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신기하게도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고된 노역으로 뼈와 가죽뿐이었지만 그들은 수용소 담아내 피어있는 꽃 한 송이, 붉게 저물어 가는 석양, 오늘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동하며 감사했다. 그들에 비하면 지금 내 삶에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 것들이 많은가. 불평불만은 하나씩 하나씩 지운다. 그럴수록 삶의 의미는 더욱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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