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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Apr 12. 2021

나는 서열 1위가 되었다.

'이특권을 즐길거야.'

https://brunch.co.kr/@uriol9l/183


2021년 2월 26일.

작고 까만 강아지가 아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사시나무가 떨듯 덜덜 떠는 모습이 안쓰러워 안으려 했지만 강아지는 내 눈을 휙 피하며 아이의 팔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바닥에 내려놓았을 때 강아지는 구석진 자리에 몸을 숨겼다. 강아지 집을 가까이 놔주니 조심스럽게 들어가서 등만 보여주었다. 물그릇과 밥그릇에 사료를 가득 담아주었지만 겁을 먹은 건지 하루 종일 입을 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부터 녀석은 의자의 다리를 핥기 시작했다. '왜 이러지? 혹시 목이 마른가?' 물그릇에 물을 주고 손에 물을 떠줘도 도망가기 바빴다. 검색해보니 의자 다리 부분이 물통에 스테인 볼 느낌과 같아서였나 보다. 나는 바로 애견숍에서 물통을 사 와 물을 담아 주었다. 조심스럽게 나온 아이는 그제야 물을 "척척 척척"소리를 내며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부어두었던 사료를 하나씩 그릇 밖으로 꺼내어 씹어 삼켰다.


2월 28일.

내가 방에 들어가 있을 때 이곳저곳 실수를 하고 다니는 바람에 이틀째 빨래가 넘쳤다. 집이 조금 익숙해진 건지 강아지는 내가 없으면 거실이며 방들을 왔다 갔다 돌아다녔다. 내가 부르면 휙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녀석이었지만 남편과 아들에게는 꼬리를 흔들며 따라다니기 바빴다.


"사람 볼 줄 아는 강아지네. 자기가 밥이랑 간식 줘봐. 친해져야지."

"여자를 원래 싫어하는 아이인가 봐요. 왜 나한테만 저러지? 저게 말로만 듣던 개무시라는 건가?"


강아지의 소변 실수를 닦고 편백나무 액을 칙칙 뿌리는 내가 마치 녀석의 시녀가 된 듯 느껴졌다. 내게 안기면 기꺼이 사랑으로 돌봐줄 텐데 녀석은 보름이 지나도록 내 손을 거부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 커서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혹시 어릴 때 여자 사람에게 학대를 당한 건지... 무거운 마음에 괜히 친정엄마에게 전화로 넋두리를 떨었다.


"엄마 강아지가 나한테만 안 와. 왜 그럴까?"

"그러게 동물 키우기가 어디 쉬울 줄 아니?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하고 너만 힘들지. 그래도 애는 좋아하지?"

"애는 엄청 좋아하지. 자기 여동생이라고 아주 그냥 물고 빨고 뒹굴고~"

"그러면 그걸로 만족해. 아이가 행복해하는 거 그거 하나로 너 힘든 거 차고 넘치게 보상받은 거니까..."


친정엄마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와 친해지지 않아도 아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좋은 친구이자 동생으로 빈 구석을 채워줄 테니 그걸로 되었다고 말이다. 억지로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할 일을 하면서 기다려보자. 몇 달 지나면 그래도 피하지는 않겠지.'


변화는 30여 일이 지나면서부터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아침에 일어나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수족 냉증이 있기에 늘 담요를 덮고 있는데 그날은 날이 좋아 담요를 곁에 두었다. 한창 글을 쓰다 옆을 보니 내 담요 위에 강아지가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 같으면 내 손만 가져가도 달달 떨며 도망갔을 텐데 그날은 그대로였다. 녀석의 배 부분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털의 부드러움, 작은 심장이 콩콩 뛰는 감각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감동은 서시히 온 몸에 퍼져갔다.


'이제 내가 무섭지 않은 거야? 그래. 난 네 시녀가 아니라 가족이야.' 편안하게 잠들어 있던 녀석이 일어나 내 무릎으로 올라왔다. 정말 몇 시간 전까지 나를 외면했던 아이인가 싶어 인증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전송했다.


-오오~ 대봑~ 성공했네 축하축하. 이제 서열 3위 된 건가? -

-글쎄요~ 모르죠.-


강아지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고 따른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는데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그렇게 꼬리를 치며 반기던 남편과 아들이 하루아침에 찬밥이 되었다. 외면까지는 아니지만 이제 나만 졸졸 따라다닌다. 내가 앉기만 하면 내 위에 폴짝 올라온다. 부러움에 자기도 해볼 거라며 남편이 녀석을 안아 들었지만 뛰어내리고 만다. 남편이 간식을 주면 그 간식을 내 무릎 위에 올라와 먹는다. 아이가 불러도 잠깐 놀아줄 뿐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내 옆에 앉아 있다.


"도대체 우리 없을 때 뭘로 녀석을 구워삶은 거야. 아주 그냥 껌딱지네 껌딱지."

"엄마는 좋겠다. 나만 졸졸 따라다녀서 좋았는데... 이제 엄마만 따라다니잖아요. 힝."

"우리도 비법 좀 전수해 줘. 아놔 진짜~"


두 남자의 투정을 듣는 와중에도 그러든지 말든지 강아지는 내 품 위에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 며칠 사이에 나를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건지~ 내가 한 것이라고는 열심히 이 녀석의 밥과 물을 챙겨주고 배변 판을 갈아줬을 뿐이었는데...


"이제 밥과 물, 간식은 네가 챙겨주고, 자기는 배변 판을 꼭 닦도록 해요. 그러면 친해질지도 모르니..."


서열 1위의 특권이란 이런 것일까? 나는 강아지 돌보기에서 조금 벗어났다. 내가 서열 1위로 올라서면서 서열 4위가 되어버린 남편은 요즘 퇴근하자마자 강아지 뒤치다꺼리에 바쁘다. 언제까지 이 특권이 유효할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기다렸던 것처럼 이 기분을 만끽하리라. 고마워~ 강쥐~

나를 외면하던 아이가 내 무릎 위에서 잠들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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