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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13. 2021

와이프가 아니라 딸입니다만...


친정 부모님께서 새 아파트로 이사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친정 엄마께서 몸살이 나셨다는 이야기를 아빠에게 듣고 나는 급히 전복죽과 밑반찬을 만들어 집을 나섰다. 부모님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편의점에서 나오는 친정 아빠와 마주쳤다.


"아빠, 살 거 있으면 저 시키지."

"아니야. 너 짐 들고 올 것 같아서... 뭘 또 이렇게 바리바리 싸왔냐"

"엄마 아프시다니까... 죽이랑 반찬요."


아빠는 내 왼손에서 짐을 받아 드셨다. 자연스럽게 빈손이 된 내 왼손은 아빠의 오른손을 꼭 잡았다. 오랫동안 합기도, 유도를 하셨던 아빠의 손은 두껍고 뭉툭해서 두꺼비 손을 닮았지만 나는 그런 아빠의 거친 손을 무척 사랑했다. 수족 냉증이 있는 내 손과는 반대로 아빠의 손은 365일 따뜻했기에 더 잡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서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 띵동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70대 후반 정도 돼 보이는 할머니께서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르셨다. 나는 자연스럽게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시던 할머니께서 우리를 보며 말씀하셨다.


"아따~ 아내가 젊어서 좋겄소. 부부는 닮는다 더만 인상이 똑같구마잉."

"네?"


나는 너무 놀라 할머니와 아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시길 바랐는데 아빠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입을 꾹 다무셨다. 맙. 소. 사. 내가 어딜 봐서 아빠와 부부 사이로 보인다는 말인가. 나는 아빠의 손을 놓고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평소 동안이라고 자부했던 나였는데 그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아빠와 내 나이 차이는 23살. 물론 아빠께서 동안이셨지만 아빠와 딸이 아니더라도 삼촌과 조카뻘이라면 모를까? 부부 사이라니...


"아니에요. 저 딸이에요. 딸."

"딸이오? 오메...."


할머니의 당황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띵동' 하고 열렸다. 그분은 후다닥 엘리베이터를 내리셨다. 문이 닫히고 아빠를 바라봤을 때 어찌나 큰 목소리로 웃으시던지...


"엄마에게 말하지 말아요. 아놔 징짜~ 왜 할머니께 제가 딸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너무해"

"너랑 나랑 닮아서 그렇지 뭐. 살다 보니 딸보고 와이프 같다는 말도 들어보네. 나 참."


내 기분이 별로였지만 아빠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가족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아빠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차돌도 맨손으로 깨셨던 아빠께서 건강이 악화되신 이후로 나와 나란히 걷는 걸 어색해하신다. 혹시라도 편마비로 불편하게 걷는 아빠를 보며 딸까지 불쌍한 시선으로 보이는 게 싫으셨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없는 산책로를 걸을 때 내가 아빠 곁에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면 아무렇지 않게 걸으셨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이면 먼저 가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아빠가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적 없어요. 나는 아빨 사랑하고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 손 안 놓을 거예요." 내 손을 놓으려는 아빠에게 나는 그렇게 말씀드렸다. 아빠는 예전과는 다른 부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셨지만 금세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아빠는 내가 첫걸음마를 했을 때 두 손을 꼭 잡아주셨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아빠의 손을 잡아드린다.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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