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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May 21. 2021

완두콩에 진심입니다.

4대째콩 덕후

5월 하순이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배달되는 것이 있다. 울퉁불퉁 단단한 껍질 속에 올망졸망 자리 잡은 완두콩. 평소 콩을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완두 콩이라고 말할 테다. 내 입맛을 쏙 빼닮은 아들도 콩을 사랑한다.


"엄마 완두콩 어디서 났어요?"

"어~ 할머니께서 택배로 보내주셨어."


삶아서 먹을 일부를 따로 빼놓고 밥에 넣어 먹을 콩을 까기 위해 나는 볼을 꺼내었다. "엄마 이건 내가 깔게요. 다른 거 하세요." 가지고 놀던 레고를 저만치 던지고 아이는 야무지게 앉아 콩을 까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아이는 완두콩을 깠다. 콩과 손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표정을 보며 마치 어릴 때 나를 보는 듯 해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께서는 농사를 오랫동안 지으셨다. 주로 쌀과 파를 재배하셨지만 집 뒤편에 자리한 텃밭에는 늘 콩을 심으셨다. 할머니께서 메주를 만들 노란 콩과 함께 나와 아빠가 좋아하는 완두콩이 그 밭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어쩜 콩 좋아하는 건 할아버지랑 너희 부녀가 똑같냐~ 콩이 머시 맛있다고..." 콩을 싫어하시는 할머니께서는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나를 보며 그리 말씀하셨다. 그런 핀잔에 할아버지는 "피가 같은디~"라며 할머니께 대꾸하시면서 밥 속에 든 귀한 콩들을 내 밥그릇에 옮겨 주셨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비닐봉지에 깐 콩을 가득 넣어 "밥에 넣어 묵어라잉."이라고 하셨다. 나는 차 안에서 콩을 마치 귀한 것이라도 되는 양 꼭 안고 집에 왔더랬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쌀밥을 좋아하는 엄마와 남동생. 콩을 좋아하는 아빠와 나. 우리의 식탁은 언제나 콩밥파와 쌀밥파가 공존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콩을 좋아하는 부녀를 위해 엄마는 꼭 완두콩을 커다란 망태기로 사 오셨고, 나는 아빠와 마주 보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껍질을 분리했다. "이거 엄마한테 일부만 삶아 달라고 할까요?"내가 아빠에게 속삭이면 "안돼. 우리 둘이 먹으면 너무 금방 먹어. 밥에 넣어 먹어야 오래 먹는단 말이야." 아빠는 반기를 들곤 하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픈 아빠 생각에 나는 잠시 강낭콩을 까는 것도 잊어버리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엄마 거의 다 깠어요. 캬~ 엄청 많네. 우리 이거 1년을 먹을 수 있어요?"

"아니 금방 먹을걸. 겨울엔 검은콩 넣어서 밥하면 되지."

"할아버지도 콩 좋아하시는데... 아? 그냥 할아버지 드릴 것도 지금 깔까? 손 불편하시니까 제가 까면 더 맛있게 드실 것 같아요. 다음엔 할아버지 집에 가서 같이 깔래요"


'참. 기특하고 고마운 아이다. 자기도 콩 좋아하면서 할아버지까지 생각하다니...' 나는 아이가 깐 완두콩을 반으로 나누어 비닐팩에 넣었다. 하나는 아이가 할아버지께 직접 드린다며 챙겨두라기에 그러겠다고 말했다. 조만간 3대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완두콩을 까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완두콩에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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