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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Oct 26. 2021

독기는 의사의 눈빛에서 시작되었다.

다이어트 30일의 기록.


"젊으신 분이 몸 관리를 이렇게 하시면..."

불과 1미터 앞에 낯선 남자가 컴퓨터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왼손에는 들려있는 검정 볼펜은 쉴 새 없이 책상을 탁탁 쳐댔다. 시계 초침처럼 일정한 속도의 딱딱거림에 불편한 기색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고지혈, 당뇨, 혈압, 간 수치는 두 배라..."

이번에도 남자는 문장의 끝을 꿀꺽 삼켜버렸다. '어서 끝까지 말하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흐릿하게 보이는 모니터를 덩달아 쳐다봤다. 화면에는 영어 단어들과 숫자들이 행과 열을 맞춰 정렬되어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무슨 뜻인지 해석할 수 없어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가장 급한 건 역시 간 수치 같네요. 한 달 동안 약을 복용해 보시고 피검사를 합시다. 평소 운동 안 하시죠?"라는 그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혹시 약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요? 제가 수면제랑 진통제를 평소 먹거든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건 비만과 운동 부족이 더 정확할 겁니다."



두 번째로 팩폭을 맞고서야 그를 바라보던 내 시선은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그는 볼펜 소리를 멈추었다. 그리고 마치 '더 볼일이라도?'라고 말을 할 것처럼 내 눈을 바라보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반을 가렸지만 눈빛에 '경멸과 불쾌함' 이 서려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방을 들고 진료실을 나오면서 한 달 뒤에는 꼭 저 남자 입에서 "노력 많이 하셨네요."라는 말을 듣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건강 검진 때문에 20시간 단식했지만 그 순간 전혀 배고프지 않았다. 오히려 병원을 나서는 동안 내 입안은 쓰고, 떫었다. 아마 그날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내가 품은 독기를 보았을지도.




9월 24일. 아침 8시. 10년 만에 받아보는 종합검진이었다. 신상을 확인하고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니 친절한 간호사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건강검진 순서를 꼼꼼하게 알려주었다. 피검사를 시작으로 청각, 시각, 초음파, 내시경, ct, 등등. 검사실을 쉼 없이 옮겨 다니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내 몸속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랐다. 언제 갑상선 결절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으며 혈압은 130을 넘어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몸 이곳저곳에서 작은 신호를 보내왔다. 딱히 무리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집안일을 했음에도 양쪽 어깨는 납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해 늘 수면유도제를 먹어야만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모를 잃은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자꾸만 단 음식을 찾아다녔다. 특히 가장 좋아하는 빵은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리미리 구입했다. 언제부터인가 주방에서 거실을 지날 때마다 내 손에는 달달한 단팥빵이 들려있었다. 입에서 맴돌던 행복감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몸에 나쁜 것들이 채워지는 순간에도 '언제든지 끊을 수 있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정확히 2개월 반 동안 내 몸은 온갖 나쁜 것들로 길들여졌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검진은 어쩌면 신의 한 수였는지도 모른다. 빙하보다 더 차갑게 말하는 의사의 말 덕분에 나는 그날 바로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빵, 과자, 라면, 그리고 냉장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맥주가 처리 대상 1호가 되었다. '일단 아까우니까 오늘까지 다 먹고 내일부터'라는 생각은 애초에 버렸다. 마치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이 성형과 다이어트를 위해 집에 있는 모든 음식들을 쓰레기봉투에 버린 것처럼 나 역시 꽉꽉 채워서 쓰레기장에 휙 던져버렸다.



그날 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었다. 첫 목표를 -만보 걷기-로 두면 걷지 못했을 때 스스로에게 실망할 것 같아 한 달은 8000보로 휴대폰 앱에 설정해 두고 무작정 걸었다. 평소 산책을 할 때보다 조금 더 빠르게!! 5000보 정도 걸으니 몸에서 땀이 송골송골 나면서 노폐물이 빠지고 있다는 신호를 주었다. 발목이 살짝 아프긴 했지만 첫날 만보를 무사히 걷고 집에 들어왔다.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할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부터 하지. 무리해서 아프면 어쩌려고."

남편은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마음을 먹었을 때 바로 실행하면 절반은 성공이라고 이야기했다. 몸의 적신호를 그냥 바라보면서 아픈 몸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는 일. 그동안 슬픔과 우울함에 빠져 방치했던 내 몸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건강한 몸으로 나를 '길들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10월 24일. 만 한 달간 나는 스스로와 했던 약속을 지켰다. 비가 오든, 한파가 오든 몸이 무겁든 간에 최하 8,000보를 걸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2만보를 걸었다. 한 달 동안 끊기로 다짐했던 빵과 술은 단 한번 입에 대었고, 그마저 마음에 걸려 땀을 더 뺐다. 처음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 내 몸무게에서 정확히 오늘 아침 5.3kg이 빠진 상태이다. 꽉 끼던 트레이닝 복이 조금 헐렁해지고 움직임이 예전보다 더 가벼워졌다. 



그래고 드디어 내일 피검사를 하러 의사를 만난다. 간수치가 내려왔다면 나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리라. 나를 가장 사랑해 줄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걸. 그 길들임이 틀리지 않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다. 올해 꼭 코로나 전 내 모습으로 돌아간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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