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 가방에 ‘불안’을 넣어 보냈다.

by fragancia


*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큰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아이를 안고 있으면 충만해지고, 쏟아지는 일을 쳐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동료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에 눈물이 핑 돌며, 오늘 있었던 화나는 일에 분개하다가도 술잔을 기울이며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데에 가슴이 찡해집니다.

그렇게 좋은 순간은 어느 곳에나 있고 우리는 날마다 행복을 경험합니다. 행복에 대한 정의도 어렵고,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행복은 ‘나쁜 게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 ‘좋은 게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 마음의 지혜. (김경일)


Q. 가족, 친구, 자신 누구나 좋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짧은 편지를 써주세요.




학창 시절, 나는 늘 경계에 서 있는 이방인이었다. 여러 번의 전학으로 푹 숙여 걷던 등굣길,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 하나 없이 혼자였던 점심시간, 어색한 웃음으로 하루를 버텨내야 했던 그 시간들이 아들의 중학교 입학과 함께 다시금 내 삶으로 밀려들었다. 나는 그 아이의 미래를 불안으로 채워 넣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시간, 아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베란다 창틀에 매달려 아이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곤 했다. 나를 위한 일들을 찾아 몰입하려 해도 마음 한편은 무거웠다. 하교를 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시간이 흐르며 아이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학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 아이의 닫힌 방문 앞에서 주절주절 질문을 던졌다. 침묵이 답으로 돌아오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내 질문이 아이의 하루를 더 무겁게 만들까?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비켜가며 우리는 같은 집 안에서 각자의 불안을 안고 살았다.


그로부터 20여 일이 지난 뒤, 학교에서 학부모 설명회가 열렸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참석한 학부모들로 강당은 꽉 찼다. 교직원 소개, 부서별 교육 과정과 학교 생활 안내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서 유독 마음을 붙잡은 것은 ‘오늘의 감사’라는 활동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매일 아침 등교 후 짧게 적는 세 개의 감사 기록.

벽면에 아이들의 감사 노트가 띄워졌다. “엄마가 소리치지 않고 깨워줘서 고마웠다”, “매점이 생겨서 감사했다”, “하교 시간 버스에 자리가 있어서 감사했다.”, "학원을 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거창한 다짐도, 성취도 아닌 아주 사소한 감사를 보자 앉아 있던 학부모들의 웃음소리가 강당에 퍼졌다.


"내용이 참 소소하죠? 아이들이 하는 "아싸, 개 좋아, 개꿀" 같은 말들이 사실은 감사 표현임을 이젠 압니다."

단상 앞에 선 선생님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를 버텨내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학생들은 알고 있었다.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 조금은 모자라고 때로는 힘든 하루 속에서도 ‘괜찮은 것 하나’를 찾아내는 아이들의 글씨가 학부모의 마음에도 새겨지고 있었다. 중학교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감사를 써 내려갈까. 그 문장들은 쌓이고 쌓여 아이의 시간이 될 것이다. 힘들었던 날들도, 서러웠던 순간들도 언젠가는 다른 빛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적는다는 것은 남기는 일이고, 남긴다는 것은 결국 다시 꺼내어 자신을 지탱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이가 그 노트를 펼쳐볼 때, 그 안에는 단순한 문장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일으켜 세웠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설명회가 끝나고 교실에 들러 아이가 공부하는 책상에 앉았다. 사물함과 교실 뒤 벽면에 있는 단체 사진들도 주의 깊이 들여다보았다. 중학교 입학 후 집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이의 밝은 웃음이 사진 속에서 내 눈과 마주했다. 내 안에서 자리를 키웠던 불안이 심장과 무릎을 지나 발끝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감사한 순간이구나' 감사한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짧은 편지를 적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네가 중학교 입학하는 날, 엄마는 네 가방 속에 오래된 두려움을 몰래 집어넣었어.

네가 혹시 혼자일까 봐, 마음 둘 곳이 없어 서성일까 봐, 내가 겪었던 그 외로운 시간을 너도 지나게 될까 봐 엄마의 시계는 온통 과거에 멈춰 있었지.


하지만 오늘 네가 등교하는 길을 따라 30분을 걷고, 생활하는 교실과 책상,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며 엄마는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어. 너는 이미 너만의 빛으로 어둠을 밀어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매일 감사 노트를 쓰며 완벽한 하루를 꿈꾸기보다, 서툴고 힘겨운 하루 속에서도 '괜찮은 것 하나'를 건져 올리는 네가 대견해. 엄마보다 훨씬 단단하고 멋져. 담임 선생님께서도 너를 칭찬하시더구나.


앞으로 이어질 3년의 시간 동안 너는 수많은 문장을 써 내려가겠지. 네가 남긴 작은 감사의 흔적들이 언젠가 네 삶의 무게가 휘청일 때, 너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도구가 되어 줄 거야. 이제 엄마는 베란다 창가에서 불안을 굽어보는 일을 그만두려 해. 대신 네가 등하교할 때, 따뜻한 품으로 꼭 안아줄게. 너의 모든 걸음을 온마음으로 응원할게. 사랑해.




우리는 모두 각자의 '오늘의 감사'를 마음속 깊은 곳에 적으며 살아간다. 다만 일상의 소음과 분주함에 가려 그 소중한 문장들을 들여다보지 못할 뿐이다. 하루를 마치고 잠들기 전, 오늘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하나면 충분하다. 나를 잠시 멈추게 했던 순간, 나를 조금은 덜 외롭게 했던 장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했던 기억. 시간이 하락한다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문자든, 쪽지든 감사를 표현해도 좋겠다.


그 한 줄이, 내일을 견디게 할지도 모르니까.


아이가 돌아오는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제 불안한 눈빛 대신, 오늘 아이가 발견했을 '괜찮은 것 하나'를 궁금해하며 문을 열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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