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gancia Aug 05. 2020

이건 꼭 사야겠어요.

비행기 카탈로그에서 사고 싶은 것.

"아빠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글쎄~ 딱히 없구나. 몸 건강히 나 다녀와 아무것도 안 시도되니까..."

"에이 그래도요.~^^ 그럼 제가 사고 싶은 거 사 올게요. 생각나는 게 있네."


제주 외할머니 댁으로 3박 4일 휴가를 보내기 위해 짐을 싸면서 아빠와 대화를 했었다. 내가 20대 중반, 아빠는 한창 서울에서 강의를 하시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셨고 주말이면 집에 오셨다. 가족들이 다 함께 제주 방문을 원했던 나지만 단 한 번도 우리 가족은 함께 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우겨서라도 갈걸....

'이번에 제주 다녀오는 길에 아빠 서류 가방을 사 와야겠어. 꼭'

내가 6살 무렵. 가족이 살던  집에 도둑이 들었다. 월세 사는 집에 뭐 훔쳐 갈게 있다고 방문한 걸까? 너무 어려서 나는 헝클어진 방 모습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는 많이 놀라셨다. 없어진 것은 단 하나. 아빠의 007 가방. 그 당시 양쪽에 3개의 번호가 맞아야 열리는 그 가방에 뭔가 들어있을 거라는 추측으로 도둑은 그걸 들고 간 모양이었다. 금품은 없었다. 하지만 돈보다 더 값진 것이 그 안에 들어있었으니 그것은 아빠의 강연 원고, 오랫동안 들고 다니면서 연구했던 책...

아빠는  돈이 안 되는 물건이기에 혹시라도 두고 가지는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며칠 잠도 못 주무셨다고 하셨다. 아마 컴퓨터도 없는 시절 타자기로 힘들게 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더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의 바람처럼 소중한 자료는 받으실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아빠는 정장에 007 가방을 든 멋진 남자였다. 마치 영화 '킹스맨'의 요원처럼  포스가 있었던 우리 아빠...


나는 제주도에서 다녀오면서 아빠의 가방을 구입했다. 한동안 아빠는 그 가방을 들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그 가방이 그대로 있다. 이제는 들어주지 않는 아빠의 손길을 기다리면서~ 먼지가 앉은 채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시고 왼쪽 손에 들고 다니시던 가방은 이제 들지 못하게 되었지만 다음 제주 방문 때 나는 다시 아빠의 가방을 사드리려 한다.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쇼핑 카탈로그를 열고. 아빠에게 선물하고 싶은 가방이 딱 거기에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선택할 것이다. 가방 안에 아빠가 그렇게 아끼시던 강연 원고와, 책은 없더라도 딸의 사랑을 가득 넣어서 말이다. 이제는 007 가죽 가방이 아닌 옆으로 맬 수 있는 편하고 가벼운 가방. 들기 힘드시면 내가 곁에서 걸으며 들어드릴 수 있는 편한 가방. 그동안 크고 무거웠을 아빠의 가방이 내게는 무척 가볍게만 느껴질 그날을 나는 꿈 꾼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을 기다리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