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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gancia Sep 07. 2020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한 벗에게...

"마지막으로 너와 통화하던 날. 나는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이 아직도 가슴에 박혀있어. 팍팍한 회사 생활에서 좋은 동료로, 진정한 친구로 남아준 네게 너무 고마웠다고 널 알게 되어서 행복했다고... 너와 마지막 인지도 모르고 우린 웃기만 했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도 너처럼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수 있겠지. 그래서 "카르페디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라는 말을 마음에 담고 살고 있어. 지금 이 순간 고마운 사람에게 더 표현하고 더 사랑해야지. 그래야 죽음 앞에서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녀를 처음 만난 건 회사에서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매달 실적관리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 유독 여유가 넘쳤던 그녀. 동기들 중 승진이 빨랐던 나를 보며 질투보다는 축하를 아끼지 않았던 그녀의 환한 미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잘 되었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연민은 갖기는 쉽지만 질투를 버리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오래 벗으로 지내도 좋을 사람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그녀는 입사한지 1년 무렵 내게 청첩장을 내밀었다.


"내가 퇴사해도 만나줘야 해~ 응?"

"그래야지. 이제 직장동료가 아닌 친구 사이로 잘 지내보자고~"


결혼 후 퇴사 이야기가 사내에 돌았지만 평소 인간관계가 워낙 좋았던 그녀의 결혼식에 많은 동료들이 참석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발목 잡히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선배들도 있었지만 별문제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내 예상과 일치하게 그녀는 더없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렸다. 몇 달 후 사랑의 결실이 뱃속에 있다고 전했던 날, 뛸 듯이 기뻐했던 우리. 입덧이 끝나고 가장 먹고 싶다던 회사 앞 삼계탕 집에서 뼈까지 발라먹던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임산부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아직 어린 나이에 "결혼"을 멀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결혼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다정한 남편, 현명한 아내, 토끼 같은 아이.. 언젠가 내가 가정을 꾸린다면 그녀처럼 더없이 행복하고 싶었다. 첫째 육아에 지쳐 힘들 만도 한데 둘째 아이의 임신소식에도 축복이라며 웃었던 그녀. 아들 딸 100점짜리 엄마의 탄생이 예견되어 있었다. 


"둘째는 딸이니까 좀 더 수월하겠지? 얼마나 예쁠까 빨리 보고 싶어"

"너 닮았으면 정말 예쁠 거야.  순산할 테니 너무 걱정 말고 낳으면 꼭 연락해. 보러 갈 거니까^^"




이 대화가 그녀와 나의 마지막 통화가 되리라고 그때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는 꽃다운 26살이었으니까... 그리고 첫 출산도 아닌 둘째를 낳으러 가는 길이었으니까...

아침에 분명 진통이 와서 아이를 낳으러 가겠다는 그녀는 퇴근 무렵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쁨에 들떠 전화가 올 거라는 기대가 점점 걱정으로 바뀔 때 즈음 울렸던 전화. 그녀의 폰으로 남편이 건 전화였다. 아이를 잘 낳았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더 큰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눈을 감았다는 소식... 귀를 통해서 들은 것 같은데 뇌를 거쳐 심장까지 도달하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우두커니 서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통화를 마무리하고 나서야 침대에 쓰러져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해...'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는 순간  딸을 품고 있으면서 나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귓가에 들려왔다.


 첫째는 파란색만 입혔는데 분홍색 배냇저고리며 양말이며 출산준비를 다시 하는 기분이 묘해.

 나도 오빠 있어서 참 좋았는데 우리 딸은 얼마나 오빠를 따라다니면서 예쁨을 받을까~

 우리 이제 완전체 4인 가족. 너무 좋다.

 너 결혼하고 출산준비할 때를 위해 내가 누구 안 주고 모두 보관할 거야. 그러니 빨리 결혼해 알았지?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뿐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메멘토 모리" - 내가 죽을 것임을 기억하라~ 그녀는 둘째를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채 먼 곳으로 떠날 것임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첫째 아이에게도 동생을 곧 만날 수 있다며 희망적인 이야기만 해주었으니까...


하루라도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신의 축복이자 선물임에 분명하다. 그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로 나는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몇 해가 지나 나도 결혼과 임신을 했을 때 꿈에서나마 우리는 자주 만났다. 아이를 낳으러 가던 그 순간까지 나는 걱정이 깊었다.


혹시라도 그녀처럼 예고도 없이 떠나버릴까 봐 임신을 알게 된 그날부터 태교일기를 꼼꼼히 기록했다. 나의 부재에도 아이에게 사랑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다행히 나는 아이를 건강하게 출산했고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9년째 아이의 육아일기를 기록하고 있다.


한 송이 꽃처럼 어여뻤던 26살 그녀. 내 삶에 큰 획을 그어준 그 이별이 지금 이 순간을 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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