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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Oct 02. 2021

생명이라는 이름


잠이 오질 않아서 옆에서 자고 있는 딸아이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딸아이를 끌어 안고 있었다. 향긋한 비누 냄새와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코를 간지럽힌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기도 하는데 부모가 되면서 얻은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생명의 소중함을 마음속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걸 거다. 예전 딸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 케냐의 소도시로 출장을 갔다. 


출장이 너무 가고 싶기도 했고 기존 출장에 비해 정적인 출장이라 팀장님께도 임신사실을 알리지 않고 짐을 꾸렸다. 인천 공항에서 방콕을 거쳐 나이로비에서 다시 작은 비행기를 타고 가서 차로 두어시간을 더 가는, 긴 여정이었는데 마지막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뭔가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혈이 시작된 거다. 


나이로비에서였다면 큰 병원이 있었을텐데 작은 도시에서 비행기에 내리자마자 그 사실을 깨달은 터라 옵션이 많지 않았다. 호텔에서 주말동안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지내다 월요일 아침, 고장난 낡은 체중계가 있고 불도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로컬 클리닉에서 진료를 보고 앰뷸런스를 타고 그 지역에서 하나뿐인 초음파를 볼 수 있는 검사시설로 가서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기까지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괜찮을지, 엄마와 아빠의 잘못된 판단으로 귀중한 생명이 우리를 떠나가는 건 아닌지. 아기가 건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워크샵에 얌전히 참석하고 그 다음주 필드로 갔다.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focus group discussion을 진행하는 거였는데 한 어린 여자아이가 자기 아기를 안고왔다. 난 지 백일은 되었을까. 


다른 아이들이 열심히 그림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제대로 참가를 못하는 아이가 딱해서 아기를 안아주겠다고 하니 그 여자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품에 안은 아기와 눈을 마주쳤을 때의 순간을, 나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아프리카에 한 두번 가본 것도 아니니 그 전에도 꼬마들과 아기들을 많이 봐왔다. 아프리카 아이들 특유의 똘망똘망한 눈과 귀여운 모습 때문에 아이들을 보면 늘 행복해지고 힘이 솟긴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귀엽거나 예쁘거나 순하거나 해서가 아니라, 생명은 정말 귀한 거구나. 여러 가능성과 상상할 수도 없는 확률과, 아마도 여러 어려움을 겪고,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이 아이, 이 생명이라는 놀라운 존재가 이렇게 온 거구나. 여러 생각과 감동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 이후, 딸이 잠든 모습을 보며 딸아이의 머리카락이며 보드라운 볼을 만질 때나 꼭 포옹을 나눌 때면 기막한 우연을 거쳐 나에게 온, 꽃씨보다 작던 존재가 이렇게 살 부대낄 수 있는 실체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다. 이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새로운 관계들로 인해, 또 아이가 살면서 만들어갈 크고 작은 변화들로 인해 세상은 이제 이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과 다르다는 것.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특별하다는 것. 


그 간단하지만 종종 잊고 사는 중요한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해준 딸, 나의 세상, 나의 우주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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