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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ah Dec 05. 2020

나는 페미니스트이면서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다른 사람의 상황에 처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입장과 경험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임신을 하고 나서야 왕복 2시간, 사람으로 꽉 찬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회사에 다니며 임산부석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유모차를 끌고 나서야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한국과 일본이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이나 유모차를 끄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른 나라로 느껴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미국에서 알게 된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분이어서 그분을 통해 미국에서 맹인으로서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일단 장애인과 함께 버스를 타면 그 장애인은 물론 그 동행하는 사람에게까지 무조건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또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를 장애인 지원센터에 가져가면 그걸 다 녹음해서 음성파일로 제공하거나 혹은 점자책으로 만들어준다.

시험 시간도 일반인보다 두 배 이상 제공됐다.

학기 초 제공되는 수업의 커리큘럼에는 항상 'Students with special needs'(별도의 지원이 필요한 학생)이라는 부분이 있어서 필요한 지원이나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저상버스를 타면 기사가 내려서 휠체어가 제대로 버스에 올라오도록 돕고 버스에 휠체어를 고정하고 다시 출발하는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진정한 선진국의 기준은 국가가 그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대하는 방식에 근거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 경험이었다.

요즘 페미니즘이 유행이다.

관련 책이 넘쳐나고 학교 교육과정에도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도입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그 사실이 한편으로 반가우면서도 또 우려되는 이유는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유동적이며 가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지나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고등교육을 받은 고소득 여성의 삶이 하층 남성이나 남성 장애인의 삶보다 훨씬 나은 것일 수 있다.

여성으로서 출산을 경험하고 경력 단절을 경험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했고 또 지금도 경험하고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내 삶이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삶아가는 삶의 어려움, 그 무게만큼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로선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게는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보다 휴머니스트가 되기를 가르치는 일이 더 온당하게 느껴진다.

한 계층, 한 젠더의 프레임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다른 이들, 특히 사회적 약자의 아픔과 필요를 민감하게 인식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성별
인종
종교
장애
계급
빈부 차이

다른 필요를 가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제 각기 기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일.

그래서 모두 제 삶의 속도대로 능력대로 살아가도 충분히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휴머니즘과 휴머니스트들로 가득 찬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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