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말 이제 이해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인생은 전력질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뉴욕에서 여러 인턴십을 거치면서 상사들이 내게 자주 했던 말이기도 하다. 그들이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처음에는 그냥 흘려보냈지만 여러 번 듣다 보니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고 싶어 마라톤을 직접 뛰어 보기로 했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 거리 단위는 마일(Mile)이다.
1 Kilometer는 대략 0.62 Mile. 마라톤은 26.22 Mile.
공간 감각이 부족한 나로서 1마일이 얼마나 되는지 감을 잡기 위해서 직접 뛰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하루에 30분씩 뛴다는 것을 목표로 동네 아스팔트로 된 평지에서 그냥 뛰었다. 처음에는 5분도 뛰지 못해 남은 25분을 걸어서 채웠다. 그렇게 무식하게 매일 한 달을 뛰다 보니 30분은 쉬지 않고 거뜬히 뛸 수 있게 되었다.
핸드폰에 운동기록을 기록해 주는 앱(application)을 다운로드하여 3마일을 시작으로 매번 0.5마일씩 늘려 갔다. 내 체력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일상생활에 무리 가지 않을 만큼만 늘리고 싶었다. 10마일을 거뜬히 뛸 수 있게 되었을 때. 종아리도 당기고 발목도 뻐근하고 근육통이 생기기 시작했다. 근처 요가 스튜디오에 들려 일주일에 3번 스트레치를 병행했다. 운동 중에 생긴 활성 산소들이 몸에 쌓이지 않게 물과 좋다는 액체 섭취량을 늘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족욕/반신욕도 병행했다.
뉴욕 센트럴파크 공원에서 장거리 연습을 시작했다. 15마일을 뛰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뛸 수 있게 되자 왼쪽 무릎이 아파왔다. 다니는 체육관 강사의 권유로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마라톤에 적합한 몸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하체 운동 상체운동을 번갈아 가며 일주일에 두 번 짐에서 운동했고 단백질과 채소량을 늘리는 식이조절을 시작했다.
21마일까지 올라왔을 때 기름진 것 빼고 골고루 먹었다. 대신 체질적으로 소화가 안 되는 밀가루, 흰쌀밥, 우유 등을 끓고 잡곡밥, 두유 등으로 대체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 초콜릿만은 끓을 수 없어 그냥 평소대로 먹었다. 그렇게 6개월 달리는 동안 다리에 근육이 탄탄하게 붙었고 그만큼 친구를 잃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하루 전날 아침 시카고로 날아갔다. 호텔에 짐을 풀고 경기 엑스포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내일 함께 달리게 될 3500명과 그를 응원하러 온 가족/지인들로 가득한 엑스포는 북적였고 먼저 내 번호표와 유니폼을 픽업한 뒤, 나머지 시간은 엑스포에 진행되는 여러 가지 행사를 구경하며 보냈다.
대회 당일 아침 6시.
가장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번호표를 달았다. 호텔 안에서 준비운동 30분도 하고 먹고, 오트밀 한 공기를 먹고 에너지 바를 몇 개 챙겨 나왔다. 호텔에서 출발지점까지는 15분 거리. 가는 길은 인산인해였다. 대회 출발점이 있는 공원 안에는 러너(runners)들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응원차 뉴욕에서 함께 여행을 온 내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출발선 뒤에서 기다리는 내내 떨림과 흥분이 교체했다. 애국가와 축사가 끝나고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지난 6개월 준비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내 식단이나 운동 방법이 맞는 건지 하면서도 불안했고
0.5마일씩 연습량을 늘려갈 때마다 성취감에 행복했었고
경사구간에서 더 연습했으면 좋았을걸 아쉬웠고
무릎이 아플 때면 '나는 시작부터 뛸 체력이 안 되는 거 같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었었다.
대회 당일날에서도,
갑자기 숨이 급격하게 차 올라 심장마비가 아닌가 했던 공포의 순간에서도
15마일 지점에서 종아리 경련이 나 움직이지 못해 당황해 할 때,
어디선가 의료 봉사원들이 달려와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마사지해주며 괜찮을 거라 위로해 준 일들도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