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나의 글에 영원히 살아줄까
하늘에서 비가 후두둑 떨어진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의 가냘픈 우산 위로, 더 가냘픈 비가 내린다. 툭툭. 한없이 가볍게 떨어지던 비는 바닥에 튀어 나의 바지에 무겁게 붙는다. 바지를 내려다보니 길거리를 차지하고 있던 비둘기들이 보이지 않는다. 모두 비를 피해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비가 오면 비둘기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만약 한 곳에 모인다면 그곳에서 모임이라도 하게 될까. 그럼 비둘기들에게 비는 반가운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도 비가 오면 보지 못했던 모든 이가 한 곳에 모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와 그러니 보자.” 이런 식으로.
비둘기는 우산이 없어 오도 가도 못할 때 나는 우산이 있어 어딘가로 걸어간다. 하지만 우산이 있어도 비를 모두 막아내지는 못한다. 우산은 내 머리만 보호해 줄 뿐 그곳을 제외한 모든 곳엔 제멋대로 비가 튄다. 비를 억지로 받아들인다. 모든 것에 쉽게 젖어들고 싶지 않은데, 항상 비처럼, 아무리 우산을 써도 사방에서 튀어 들어오는 비처럼, 생각은 나에게 말도 없이 튀어나오고, 나는 한참을 그 생각에 젖어 있는다. 비가 아니라 생각이 나서, 걷다가 걸음을 멈춘다. 생각의 장마가 시작되었다.
내리는 비 사이로 습한 기억이 달라붙는다. 걸어가는 거리마다 기억이 상주하고 있다. 누군가 보고 싶지만 그 상대가 내 앞에 실재하지는 않고 생각으로 나타나, 생각 자체가 괴로워진다. 여기서는 이 사람이, 저기서는 그 사람이, 비가 내리는 것처럼 한 사람이 한순간에 머물다 사라진다. 나는 계속 수많은 순간을 함께 하고 싶은데, 누구는 여름에 살고, 누구는 겨울에 살고, 누구는 공원 나무 아래에 있고, 누구는 내가 쓰고 있던 우산으로 들어와 팔짱을 끼며 웃는다. 여기저기 조각나 있는 그리움을 쌓아서 생을 보내고 있다.
비는 오늘의 할 일을 끝낸 듯 서서히 사라지려 하고 있다. 비가 조금씩 그쳐가자 모두가 우산을 귀찮게 여긴다. 상황에 따라 너무나 절실하던 게 갑자기 하찮아진다. 모든 건 순간을 살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엔 당연하고 필요했지만 비가 그치면 접히는 우산처럼, 상황이 바뀌면 당연하던 존재도 바뀌게 된다. 난 순간을 사랑하여 순간에만 머무느라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 변화를 늘 싫어했지만 변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갑자기 내리고 그치는 비처럼, 모든 건 찰나에 결정이 되고 그 순간이 지나면 어쩔 도리가 없다. 늘 순간이 지나갈 때 아차 하며 그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을 짧게 살며 길게 추억한다. 추억도 각각 무게가 달라, 어떤 기억은 너무 가벼워 금세 날아가 버리고 어떤 기억은 너무 무거워 나를 짓눌러버린다. 그래서 어떤 추억을 마주할 땐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워진다. 이런 식으로 마음이 너무 가라앉을 때는 무거운 기억의 한 부분을 떼어, 찰나를 쪼개고 쪼개 허공에 띄운 뒤 가련히 바라본다. 그러면 그 추억도 어느새 가벼워져 기억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게 된다.
이젠 비가 완전히 그쳤다. 한 우산 아래에 붙어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우산을 접고 간격을 벌린다. 비가 누군가에게는 고립을 누군가에게는 친밀감을 높여 준다. 둘을 꼭 붙게 만들었던 비가 그치니 그들에게 거리가 생긴다. 상황이 바뀌니 멀어지는구나 하는 순간, 그들은 이제 손을 잡는다. 비가 내려 붙어 있던 상황이 사라져도 둘의 마음은 멀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다시 다른 식으로 가까워진다.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난 늘 무엇을 탓했던 걸까. 감정만 앞세우고 본질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생각 속 비도 그친다. 비가 내려 내 우산 아래로 들어왔던 사람이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내 옆에 있다. 떠날 거라고 단정 지었던 나의 생각이 틀렸다. 나는 그 사람에게 작게 ‘미안’이라고 속삭인다. 가볍게 전하면 괜찮았을 상황을 무겁게 만들었다는 걸 깨닫는다. 내 기억 속에 무겁게 잡아두었던 사람들을 이젠 가볍게 마주한다. 생각의 비가 그쳤다. 하지만 내 생각은 언제나 장마철이라 다시 또 비가 내릴 것이다. 사람들도 비처럼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나도 내 옆 사람의 손을 잡아야지. 조금만 더 옆에 있어달라고, 네가 미워서 나쁜 말을 전한 게 아니라고. 진심을 전하돼 가볍게 말하는 연습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