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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미술관,

소소 추억

by 우사기

세이부신주쿠센을 타는 게

얼마 만이었는지 모른다.

이 전철을 타면 유학시절 살았던

전철역 바로 옆에 있었던 그 집이 생각난다.

전철 안내방송과 함께 깨고 또 함께 잠들었던.

그 집을 지나 이번엔 카미쿠사역에서 내렸다.

철로 건널목이 있는 동네,

만화 속 풍경 같은 길을 따라

나는 치히로 미술관으로 향했다.

한적한 주택가를 따라 타박타박,

좀 더 느린 걸음으로

동네 풍경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날의 비는 그런 비가 아니었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옷은 물론

신발에 양말까지 홀딱 젖게 하는

아주 강렬한 비였다.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나는 이미 보기 좋게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있었다.

(미술관 입장이 민망할 정도로)


미도리에 에워싸인 미술관은

여유로웠고 따뜻했다.

정원을 사이에 두고 왼쪽 전시실에는

1963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는

치히로의 아틀리에 가 있다.

그 풍경은 굉장히 리얼해

영화 속 한 장면 같기도 하고

그림책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아틀리에 뒤쪽에서

빨간 털 모자를 쓴 사랑스러운 아이가

달려올 것만 같은.

비를 흠뻑 젖은 미술관에서

작품 감상을 하다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뒤적이다

정원에서 쉬어가다를 반복했다.

젖은 양말은 마를 길이 없었지만

기분만큼은 치히로의 그림처럼 몽글몽글했다.

그날 나는

토마토주스 같은 링고 주스를 마셨고

자그마한 그림 액자 둘과

일상적인 에코백 하나를 샀다.


비 내리는 날도 아닌데

문뜩 그날이 떠올랐다.

(책상 오른편 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그림 액자 둘 때문인지 몰라도)

오늘은 그날의 기억으로

일상 기록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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