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
조금 늦은 아침의 산책이었다.
오하라로 향하는 버스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그래도 운 좋게 앉을 수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으니
지난해 다녀온 루리코인[瑠璃光院]이 떠올랐다.
사뭇 느낌이 닮았다.
30분가량 달렸을까
지루할 틈도 없는 창밖 풍경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버스 정류장에서 산젠인으로 향하다
살짝 샛길로 빠졌더니
시소[차조기 しそ] 밭이 나왔다.
오하라의 지형과 기후가 시소를 재배하기에
최적이라는 작은 표지판도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시소에 절인 우메보시를
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시소 밭 주위를 맴돌았다.
샛길로 빠졌다 다시 제 자리로 오니
작은 나무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젠인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어느새 앞뒤로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입구를 에워싼 듯
산젠인이 모습을 들어내자
그 주위로 사람들이 넘쳐났다.
신발을 벗고 본당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고요함을 상상하면 안 된다.
그 어떤 적막함을 바래서도 안된다.
그건 오롯이
이른 아침을 서둔 사람들만의 특권이니까.
아마도 툇마루에 앉아 내려다보는
풍경이 최고일 것이다.
이토록 신비스러운 푸른빛에
맛차 한 잔과 오카시와 함께라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느린 속도로
구석구석을 음미하고픈 마음을 뒤로하고
조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신발을 신고 정원으로 나오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발걸음을 옮겨
정원 깊숙이 들어설 때마다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갔던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강렬한 숲의 기운이
그곳의 사람들을 모조리
품으로 당겨버린 것만 같았다.
포근하고 따뜻했고 또 아늑했다.
다시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머금은
신비로운 녹음.
땅 위로 내려앉은 수많은 별들.
새소리에 박자를 맞추는 물줄기.
흐른 물이 고인 곳에 가득 찬 동전들.
수많은 이들의 바람을 담은.
나도 빌었다.
이름에 산젠인과 겹치는 한자가 들어가는
누군가의 행복을.
분명 아지사이를 쫓고 있었는데
어느새 목적을 잃고
그저 숲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산젠인 밖을 나올 때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고
간간이 마주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산젠인을 들어설 때와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마음이 평온해진 건 나뿐이 아닌 듯하다.
밖으로 나와서는 그냥 발이 닿는 대로 걸었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더 깊숙한 곳에서
호센인을 만났다.
<<호센인 이야기는 다음 편에>>
분명 좀 전에 걸어온 길인데도
돌아가는 길은 낯설게 느껴졌다.
가을이어도 좋고
또다시 봄이어도 좋고
어느 이른 아침
이 모든 길들을 다시 또 걷고 싶다.
여기서부터는 여담이다.
내려가는 길모퉁이에서
나는 작은 글씨의
[출세 신사]라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순간 망설였지만
출세라는 말에 마음이 동해
한 번 들러보기로 했다.
표지판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인기척은 사라지고
시골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혼자가 되었다.
더 신기한 건
그때부터 [출세 신사] 간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디에서 놓쳤는지도
무슨 생각을 하다 놓쳤는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에 홀린 것일까)
한참을 걸은 것 같아
되돌아가기도 뭐 했다.
막연하지만 내려가다 보면
버스 정류장이 나오겠지 싶어
그냥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낡은 오로나민C 간판에도 발을 멈췄고
돌아가고 있었는지 멈춰있었는지도 가물거리는
이발소 사인볼에도 발을 멈췄다.
그 길에서 만난 자그마한 동백꽃에도
듬뿍 시간을 내어주었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잊은 채
그렇게 아무도 없는 시골길을
타박타박 걸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걷다 보니 갑자기 잘 가고 있나 의문이 생겨
그제야 맵을 뒤적였다.
그런데 정류장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내가 내린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
그래도 일단 산 위쪽 일리는 없으니
아래로 내려가면 정류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발견한 그림 지도.
마음은 조급해지는데
그림지도는 왜 이리 귀여운 건지.
지금 여기라고 써진 곳이 있었지만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불안해졌다.
불안한 마음은
보랏빛 시소 밭을 만나자 곧바로 소멸되었다.
시소 밭에는 왜 이리 끌리는 걸까.
아아,
돌아오는 길에 우메보시를 사려고 했었지.
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지만
확실한 건 이 평온한 풍경에 발이 자꾸만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정류장일까...
기울어진 문의 각도에 맞춰
고개를 기울이며
문을 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그때쯤 길을 지나는
주민 같은 아저씨를 한 명 발견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아저씨께 길을 물었다.
마을로 나가려고 하냐고 물으시더니
정류장을 알려주셨고
가르쳐 주신 방향으로 몇 발작 가자
저쪽에서 버스가 달려왔다.
나는 미친 듯이 양쪽 손을 들어
크게 반 원을 그리며
버스를 향해 혼신의 힘으로 달렸다.
정류장을 살짝 비켜난 곳이지만
버스는 멈춰 주었고
나는 재빨리 올라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버스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것은 몹시 부끄러웠지만
사실 것보다 몇 배는 더 반갑고 고마웠다.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갑자기 출세라는 말에 혹했던 게
떠올라 웃음도 났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