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1956년부터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기념해오다가 1973년에 접어들어 아버지를 포함시켜 ’어버이날‘로 확대하여 기념해 오고 있는데, 5월 5일 ’어린이날’이 있어서 더더욱 ‘가정의 달‘ 향기가 나는 듯하다. 덧붙여 2007년부터 5월 21일을 두 사람(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에서 ’부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래서 5월이 되면 누구나 한번쯤 가정과 자신의 부모를 생각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부모 중 한 분이라도 살아 계신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두 분 모두 돌아가셨을 경우에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5월이 되면 돌아가신 부모가 몹시 그립고 보고 싶어 아내와 함께 꽃을 들고 성묫길에 오르곤 한다.
부모가 그리울 땐 내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가끔 들렀던 고향의 중국집 식당 벽에 붙어있던 「주자십회」(朱子十悔)라는 족자의 글귀가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주자십회는 송(宋) 나라 유학자 주자(朱子)가 사람이 살면서 해서는 안 될 열 가지 후회를 제시한 것인데, 그 첫 번째가 부모에 대한 것으로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뉘우친다’는 뜻이다. 두 번째는 형제자매에 대한 것으로 「불친가족소후회(不親家族疎後悔)」다. 즉 ‘가족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뉘우친다’는 말이다. 10가지 후회하기 쉬운 것 중 그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부모 형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인 부모와 형제자매에게 가장 소홀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운 좋게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입학 전 일반 아이들은 생각하지도 못할 ‘사자소학’(四字小學)이라는 한문 공부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집 근처에는 구한말 풍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당 운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그 사람들 모습은, 남녀불문하고 한복을 입고 총각과 처녀는 단발을 하지 않은 채 머리를 길게 땋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상투쟁이’라고 얕잡아 부르곤 했다. 물론, 결혼을 한 뒤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쪽진 머리를 했다. 내가 서울로 공부하러 간 뒤 얼마 후 그들은 지리산 어디론가 집단이주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다녔던 그 서당 입문서가 이른바 ‘사자소학’(四字小學)이었다. ‘사자소학’(四字小學)을 마치고 나면 광명보감(光明寶鑑)이나 명심보감(明心寶鑑) 등을 공부하게 된다. ‘사자소학’(四字小學)은 조선시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활규범과 효행 등을 가르치기 위한 네 글자의 한자로 된 교육용 책자이다. 그 내용 구성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천자(千字)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어 천자문 입문용으로도 많이 활용되었다.
어린 나이에 ‘사자소학’(四字小學)을 공부하면서 제일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은 어려운 한자보다 뜻풀이였다. 뜻풀이는 철학을 포함하고 있기에 나에게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많은 글귀 중 「애제여우(愛弟如友)」라는 말이 그렇다. 즉, ‘친구처럼 동생을 사랑하라’는 말인데 나는 도저히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구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떻게 동생보다 친구를 더 사랑한다는 말인가? 당시 나는 뭔가 잘못되었고 생각했다. ‘동생을 사랑하는 것처럼 친구를 사랑하라’는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줄곧 지속되다가 그 깊은 뜻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일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객지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애제여우(愛弟如友)」라는 말뜻을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방학 때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동생들과도 함께 보내거나 식사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시간만 되면 이 친구 저 친구랑 놀러 다니느라 집에 붙어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부모 형제보다 고향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고 얘기하고 지내는 것이 삶의 보람인 양 생각했다. 호주머니에 얼마간 돈이 있으면 동생들이 먹고 싶고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사주기보다 친구들과 마시고 놀러 다니는 데 대부분 사용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틈만 나면 귀가 닳도록 늘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부모가 죽으면 하늘에 별이 보이지만 형제가 죽으면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 ‘형제는 세상을 사는 동안 울타리이다’라고.
부모가 나이 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형제가 죽으면 ‘이제 울타리가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에 기가 막혀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다른 부모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유별나게 형제애를 강조하셨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 자식들이 욕먹지 않고 세상살이 잘하기를 무척이나 바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 말씀은 부모 사후 형제끼리 멀어질까 봐 걱정하셨고, 형제간에 화목하고 우애롭게 잘 지내야 한다는 유언과 같은 말씀이었다. 또한, 우리 부모는 평소 ‘세상을 떠나게 되면 반드시 화장을 해서 뿌려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유언 대로 화장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화장률이 90% 이상이지만, 35년 전만 해도 무연고자나 가난한 사람들이 선산이 없어 화장을 하고 웬만한 사람들은 매장을 선호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화장을 해달라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우리 형제가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할 것을 염려해서이다. 다른 집 자식들은 때가 되면 조상 묘를 찾아 깨끗이 벌초하고 관리를 잘하는데, 우리 형제들은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자칫 묘 관리를 소홀히 하여 주변으로부터 쓸데없는 욕을 먹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아버지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묘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매장을 해도 좋다’는 뜻일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의업을 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고향의 공동묘지에 모시고 관리하다가 5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셨을 때 아버지 묘를 개장하여 어머니와 함께 화장하여 지금은 서울 근교의 수목장에 모시고 있다.
나는 살아생전 아버지 말씀, ‘부모가 죽으면 하늘에 별이 보이지만 형제가 죽으면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는다’ 말을 유언이라 생각하고 늘 되새김질하면서 동생들에게 잘해주려고 나름 노력하며 살아왔다. 부모를 대신하여 동생들에게 잘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이었고, 효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에서 동생들과 함께 살면서 뒷바라지하여 모두 결혼시켰고, 홀로 된 어머니도 평생 모시고 살았다. 물론 동생들이랑 한집에 산다는 것은 나보다 아내가 여러모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아버지 말씀대로 형제간 우애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고, 동생들도 그런 내 뜻을 거슬리지 않고 잘 따라주어 고마울 뿐이다.
5년 전 어머니 장례를 치른 후 가족회의에서 부모 제사 문제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다. 한국의 제사 문화를 그대로 지키면서 유교식으로 모실 건지, 아니면 기독교 가정이므로 추모예배를 드리고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지내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형제간 의견수렴을 한 것이다. 결론은 기독교식으로 추모예배를 드리고, 부모 제사를 따로따로 지내지 않고 별도의 날을 잡아 1년에 한 번만 모시기로 했다. 그래서 매년 6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여 간단한 추모예배를 드리고 마시고 노는 가족 잔치가 열린다. 우리 전통을 지키며 제사를 지내는 가정에서 이런 우리 집 형편을 들여다본다면 막되어 먹은 집이라고 흉볼지 모르겠지만, 난 우리 아버지 말씀대로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하는데 최우선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사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도 한때는 좀 불편하더라도 우리 것을 잘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는데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변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에는 전국적으로 뷔페와 콘도미니엄 붐이 일었다. 당시 여가문화가 많지 않았던 우리들에게 콘도미니엄에 가서 놀고 자고 오는 것은 일종의 특혜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명절 때가 되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는 뉴스가, ‘일부 사람들이 조상의 차례나 제사를 콘도미니엄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당시는 차례나 제사를 집이 아닌 콘도미니엄 등 바깥에서 지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도 그런 부류를 보고 흉보고 욕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나도 많이 달라졌다. 어느새 내가 흉보고 욕했던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시간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카들 손주들까지 온 가족들을 동반하여 동남아나 제주도의 리조트 등지에서 차례나 제사를 지내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내년 설날 차례를 지낼 때, 앞으로 부모 제사는 그렇게 하자고 동생들과 이미 약속을 했는데 최근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19‘ 때문에 가능할지 모르겠다. 아울러 제사가 엄숙하고 경직된 그리고 획일화된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아 조상을 기리고 가족끼리 정을 쌓으면서 마시고 즐김으로써 조상의 뜻을 더 높이 받드는 가족 문화가 될 수 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다.
앞으로도 우리 부부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 말씀대로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할 것이다. 또한, 우리 형제들뿐만 아니라 처갓집 형제들과도 똑같은 마음으로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이나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도 화목하고 우애 있게 지내고 싶다.
그것이 곧 우리 아버지의 유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