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컴이나 신문지상에서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라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주변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실현가능성은 극히 미미하다. 일종의 자기욕심이나 바램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위나 며느리가 아무리 잘 해도 ‘사위는 사위, 며느리는 며느리’라는 것이다. 그래도 ‘딸 같은 며느리·아들 같은 사위’는 그나마 예쁜 말에 속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로부터 우리 사회에서 ‘출가외인·백년하객’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지금은 종영되었지만 어느 지상파 TV에서 ‘가깝지만 어렵고도 어색한 사위와 장모·장인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뜻으로 ‘백년손님‘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가끔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물론 작가에 의해 각본이 써지고, 출연자들은 그에 맞게 리얼하게 연기를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또한, ’고부열전‘이라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이다. 다문화가정의 고부간 갈등을 주제로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고향 - 주로 동남아지역 -을 방문하여 며느리의 성장과정을 직접 몸으로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여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출가외인‘이나 ’백년하객‘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으니, 이 말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며느리와 사위에 대한 옛 문헌을 보면, 우리 사회에는 민며느리제와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다. 고대사회는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기 때문에 노동력이 매우 중요시 여겨졌다. 그래서 결혼풍습도 노동력과 관련하여 전해지게 된다. 고대국가 옥저에는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이는 며느리가 될 여자아이를 남자 집에서 데려다 키운 것으로 딸이 없는 집에서 여자 노동력이 필요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성인이 되면 남자 쪽에서 여자 쪽에 예물을 건네주고 결혼하는 풍습이다. 요즘도 자주 사용하고 있는 ‘시집 간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고구려에는 ‘서옥제’(데릴사위제)가 있었다. 이는 남자가 결혼을 하고 신부 집에 서옥(사위집)을 짓고 살다가 자식이 장성하여 한 몫을 하게 되면 아내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장가 든다’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서옥제’는 100 여년 전 구한말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전해진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도 아들 율곡과 함께 강릉 처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살다가 상경했다고 하니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 알만하다.
장가를 들든, 시집을 가든 그 집의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았음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가외인’이란 말은 이런 구습과 달리 여자가 결혼하면 가족 구성원에서 제외되고, 남이 된다는 것이니 참으로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난 개인적으로 장인어르신과 장모님께 단 한번도 ‘장인·장모’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장인·장모’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가족 구성원이 아닌 뜨내기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아버님·어머님’이라고 했다.
지금은 작고하신 장인어르신과 술상을 마주할 때, ’딸은 출가외인이다’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따라서 딸에겐 단 한 푼도 재산상속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장인어르신의 지론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나름대로 아는 얄팍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렇지 않다는 반론을 폈지만 장인어르신은 받아 들어주지 않았다. ‘현행 민법에 의하면 아들·딸 차별 없이 똑같은 지분으로 상속 받는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당신께서는 절대 그렇게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상대대로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딸들에게도 조금씩 토지를 상속해 주셨다. 물론 아들에겐 훨씬 많은 재산을 남겨주셨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일 ‘출가외인’이라는 말의 생성과정을 알게 된다면, 우리 장인어르신은 물론 일반인들이 지금처럼 쉽게 함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갖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 정도이다. 세계에서 동북아 삼국만이 공통적으로 결혼한 딸자식을 남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은 차츰 그 말이 희석됐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선 아직도 강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말뿐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왜 그럴까?
고려 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는 지극히 남녀평등사회였다. 오늘 날 부모제사는 아들, 그 중에서도 장남이 주로 지내는 집이 많지만 그때는 장·차남이나 아들·딸 구별치 않고 형제들이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지냈다. 재산상속도 전혀 남녀차별하지 않았다. 여자가 재혼,삼혼 등 몇 번이고 팔자를 바꿔도 아무런 흠도 문제도 없었다. 이른바 자유연애의 파라다이스사회였다.
문제는 이성계의 조선건국 이후 양반가의 일이다. 특히, 불법집권한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여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양반가 여자의 재혼을 엄격하게 금했고, 재혼을 하려면 반드시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충성스럽게 한 임금만 섬기라는 뜻을 여자에게 에둘러 나타낸 것이라고 하니 당시 여자의 입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재산상속은 아들을 위주로 하되 장남에게 집중토록 했으며, 여자는 아예 배제시켰다. 여기서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고려 때부터 남녀평등사회에 익숙했던 양반들은 어명을 따르지 않았다. 어명을 어겨 발각될 경우 엄청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함에도 은밀하게 딸에게도 재산상속을 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조선중기까지 계속된다. 또한, 여자의 재혼금지 급기야 ‘보쌈’이라는 해방구가 등장한다. ‘불경이부’라는 유교적 질서가 고착되면서 과부의 수절을 강요한 결과 파생된 조선시대의 풍습이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 등 양란을 겪으면서 변화를 맞게 된다. 양란 이후 조선의 양반가는 더 이상 남녀평등상속을 해줄 수가 없었다. 이는 전 국토가 황폐화되어 먹고 살기 힘든 고난의 시대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적장자에게도 상속해 줄 재산이 없는데 어떻게 시집간 딸까지 챙길 수 있겠는가? 한번 상상해 보라. 당장 내 식솔들이 먹을 식량도 없는데 시집간 딸이 불쑥 찾아와서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를. 아마도,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출가외인인 넌 시댁에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떠돌던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이제 제대로 빛을 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정에서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아도 양반가에서 알아서 따를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상상해 보라. 식량구걸을 온 딸자식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내면서 내뱉는 말, 물론 마음에 없는 말일지라도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한 부모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 지를. 아마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또 빈손으로 돌아서면서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들은 딸자식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 속담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쫄쫄 굶고 있는 딸자식에게 조금도 양식을 주지 못한 채, ‘출가외인’이라고 하는 건 일종의 자기합리화가 아닐까? 이제 ‘출가외인’이라는 말 속에 숨겨져 있는 슬픈 부모마음의 패러독스를 생각한다면, 앞으론 이런 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출가외인’과 같은 맥락에서 ‘백년하객’도 마찬가지이다. 사위를 백년손님이 아닌 진정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때, 그 가정은 한층 더 행복감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시집간 딸이 남이고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면, 결혼한 부부는 양가에서 버림받은 천애의 고아나 다름없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다. 그러면,「남편=아내」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걸 결혼한 딸·사위에 대입하면 딸이 남이 되기 때문에 딸의 남편, 즉 아들도 남이 된다.
이제부터서라도 우리는 ‘출가외인’이니 ‘백년하객’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