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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성 Nov 02. 2023

백마리 개, 떠나는 순간

6. 남겨진 이의 몫

숨을 헐떡인다. 30kg는 족히 나갈 것 같은 개 한 마리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힘든 몸을 이끌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다닌다.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은가? 밀림에서 야생 동물은 죽기 전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난다고 한다. 여러 마리가 함께 지내는 이곳은 야생과 다를 바 없었고, 죽을 자리를 찾는 그 개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후회돼요."


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어김없이 이런 후회담이 나온다. 동물병원 입원장에서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는 이야기이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도 그랬을지 모른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나이 들어 죽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픈 것이라 생각했다. 동물병원에 가면 이 모든 것을 원상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죽어가는 중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처음이었다. 개가 죽는 순간을 목격하고 믿지를 않았다. 쳐진 고개를 손으로 부여잡고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당시 여주에 살았고 다니는 동물병원은 이천에 있었다. 차로 달려도 1시간 거리였다.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아 내 목숨을 담보로 40분 만에 도착했다. 진료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수의사가 알려주었다. 이 개는 이미 죽었다고.


의례적으로 청진기를 대어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난 다음에야 동물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차의 조수석에 눕히고 시동을 켜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물밀듯 밀려오는 슬픔을 눈물로 다 담아내지 못해 결국 소리까지 내어야 했다. 엔진소리가 요란한 차 안에서 그렇게 30분을 울었다. 슬픔인지 후회인지 잊어버릴 만큼 그렇게 울었다.




전부였으면 한다.


힘이 빠진 30~40kg의 개를 안고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질 뻔했다. 어제저녁 숨을 헐떡거리는 개를 실내로 옮겼다. 작은 개들이 차지하고 있던 이불에 눕혔다. 아픈 것이 아니었다. 숨이 다해가고 있었다. 담요를 접어 얼굴 아래 받쳐주고 그 옆에 앉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배를 어루만져 주니 꼬리가 흔들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끝에 다다른 개가 꼬리를 흔들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좋았으면 했다. 수많은 개들이 때가 되어 내 곁을 떠났다. 가누지 못한 몸을 눕혀 바깥 풍경이 보이도록 자리를 잡아주었다. 날숨으로 메말라버린 입을 적셔주고, 거품이 차오르는 콧구멍을 닦아주었다. 흘러내리는 침이 뺨을 적시지 않도록 머리맡에 담요를 갈아주고, 반쯤 감긴 눈동자에 내가 자리할 수 있도록 가까이 머물렀다.


시야가 닫히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 마지막 기억이 행복이길 바랐다. 살아온 시간이 험했어도 마지막 순간은 행복할 수 있다. 미련과 후회는 남겨진 이의 몫이라고 했다. 바로 잡을 기회가 남아있어야 미련도, 후회도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잦아든다. 이 순간 보이고 들리는 것이 녀석의 전부였으면 한다.




죽음은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기에 거부할 뿐이다. 개 한 마리의 죽음을 전하면 다들 받아들이지 못한다. 분명 어떤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 여긴다. 때로는 따져 묻는다. 거기에 슬픔이 묻어난다. 누군가 잘못이 있다면 내가 아니고 누가 있을까? 지난 시간을 되돌아 되돌리고 싶은 것이 몇 개쯤 없을까? 지나고 보니 내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려고 애쓴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해결하지 못한 실수는 되돌리는데 오래 걸렸고, 그만큼 애쓰는 시간도 길어졌다. 참 다행이었다. 애쓰는 시간만큼은 최선을 다하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모두 자연스럽게 죽지는 않는다. 다툼이 일어나고 며칠 후, 혹은 10일이 지난 후에 급작스럽게 죽는다. 놀랍게도, 아닌 안타깝게도 흔한 일이다. 며칠 전 일을 이유로 붙잡지 않을 뿐이다. 다툼에서 얻은 쇼크가 회복되지 않아 어느 순간 심장마비가 오는 것이라고 하더라. 이렇게 떠나보낸 개들이 종종 있었다. 다들 한결같이 잠자는 모습 그대로 떠났다. 누가 그랬다. 매일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축복이었다고.


여태껏 수십 마리의 끝을 함께 했다. 쌓인 채 정리되지 않은 유골함이 가득하다. 이름을 지었으나 부르지 않아 매번 잃어버렸다. 나이가 들고 몸이 둔화되어 눈에 띄면 그때서야 제대로 된 이름을 갖는다. 누군가 불러주는 그런 이름 말이다. 미련과 후회를 감당해야 할 남겨진 이에게 그 이름 하나가 유일한 위안이 되는가 싶다.




떠난 개의 화장을 위해 장례 업체를 부르고 기다리는 중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동안 곁에서 고양이 두 마리는 뛰어놀고, 나이 든 닥스훈트는 잠을 깨우지 못한다. 항상 이야기한다. 여기 녀석들을 잘 떠나보내는 것 까지가 내가 하는 일이라고. 오늘도 그리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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