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털리 부인을 아시나요?
일단은 알 것 같기도 한데 막상 안다고 하자니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영국의 작가 D.H.로렌스가 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제목만큼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그에 비해 실제로 소설을 온전하게 다 읽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문학 작품이기보다는 야한 소설이나 영화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억울한 일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로렌스 필생의 역작이며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문학 작품이다. 만일 당신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헤르만 헤세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이 소설에도 깊은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 소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섹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채털리 부인을 통해 섹스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섹스할 때 써먹을 수 있는 무슨 신박한 기술이나 기교를 배우나 싶을 수도 있지만, 그런 차원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을 배운다. 그러니 사실 한 수 정도가 아니다. 섹스의 본질, 섹스의 정수(精髓)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채털리 부인의 남편 클리포드는 전쟁으로 불구가 되었기에 재산 증식과 유지, 작가로서의 성공, 자신의 외모 가꾸기에 집착하는 귀족이다. 이에 반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되는 남자는 그 집안의 임야를 관리하는 고용된 산지기일 뿐이다. 이 남자는 묵묵히 땅에 발을 딛고 산을 돌보는 일 외에 클리포드가 추구하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하체가 마비된 귀족 남자 클리포드와 육체노동을 하며 사는 산지기, 두 남자의 대조적인 구도는 작품의 주제를 담고 있다. 얼핏 보면 마치 불능이 된 남편에게 욕망을 채울 수 없는 젊은 부인이 노동으로 육체가 단련된 산지기에게서 달려가 만족을 채우는 뻔한 내용을 예상하기 쉽고 그래서 이 소설은 참 지긋지긋하게도 불륜 혹은 외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에로티시즘 정도로 오해받는 시련을 받아왔다.
하지만 클리포드가 나타내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삶이다.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이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때 자본은 우리의 의식주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요한 돈이 아니라, 권력과 탐욕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 증식을 하는 돈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전쟁과 착취를 통해 자라났고, 우리의 삶을 반쯤 마비시키면서 맹목적으로 팽창했다. 하체가 마비된 클리포드에게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 비대해졌듯이 말이다. 성공과 명성을 향한 경쟁, 상품적 가치를 위한 외형에 대한 집착은 자본주의의 속성이면서 곧 클리포드의 캐릭터이다.
채털리 부인이 견딜 수 없었던 건 성교가 불가능해진 남편의 불구가 아니라,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자본주의적 허위로 가득 찬 그의 삶이었다.
반면 자본주의에 맞서는 인물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인 산지기다. 권력도 집착도 다 버리고 남의 시선이나 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하루하루 정직한 몸의 일을 하며 소박한 만족으로 살아가는 삶이다. 자연에 가까운 삶이다. 로렌스는 그것을 섹스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스스로 자연이 되어 살아가는 삶, 그것이 섹스의 정신이라고 역설한다.
작가 D.H.로렌스가 비판하려 했던 것은 생명을 말살하는 전쟁, 위선적인 종교,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계급,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 얄팍한 이성, 그리고 이기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천박한 감상과 정서까지, 모든 거짓과 허위(虛僞)였다.
그리고 그 허위를 이길 생명의 힘으로서, 섹스를 이야기했다! 섹스가 바로 자본주의의 반대라고 외친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항할 힘으로 섹스를 내세우다니, 작가는 정말이지 얼마나 명철하고 용감했던가! 20세기 초에 말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섹스'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함께 토론하거나 생각을 나누기에도 껄끄러운 주제다. '섹스'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은 섹스를 올바로 이해하는 길을 방해한다. ‘섹스’는 빠른 흡인력을 가졌지만 그만큼 강한 거부감에 내쳐지기도 한다. 특히 이 단어가 주는 그릇된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경우, 첫 소절도 채 부르지 못했는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관객들 뒤로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무명 가수처럼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섹스의 반대말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작가가 놀랍고 고마울 따름이다. 반대말은 종종 어떤 것의 본질을 꿰뚫게 해주는 지름길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이라는 데에 동의하는 순간, 사랑의 밑거름은 관심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듯이 말이다.
채털리 부인이 아니었다면, 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 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본주의와 섹스는 한 세트로 붙어 다니지 않던가? 돈과 섹스 – 이것이야말로 현대인들을 타락시키는 욕망의 쌍벽이 아니던가? 하지만 억장 무너질 일이다. 돈과 섹스. 정말 찰떡같이 잘 어울리게 들리는 두 단어의 조합에서 ‘돈’의 짝꿍으로 들어가야 할 말은 ‘성의 상품화’이지 ‘섹스’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성을 상품화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동시에 섹스를 억압한다. 자연이며 생명인 성(性)을 매매와 소비가 가능한 상품으로 만들어 자본화하는 행태는 섹스의 본성을 왜곡시켜 말살하는 짓이다. 겉으로는 섹스가 넘쳐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류의 참된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
돈을 탐하는 사람이 함께 탐하는 그 섹스는 자연과 생명으로서의 섹스가 아니라 본질은 모두 썩은 채 외형만 흉내 내고 있는 타락한 유희일뿐이다. 마치 부도덕한 사업가가 숲을 파괴하여 상업시설을 만든 후에 다른 숲에 가서는 '캬! 좋구나'하고 감탄하는 것과 같다. 섹스를 파괴하면서 섹스를 쫓는 자가당착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섹스를 두려워하고 미워한다. 자본주의는 허위(虛僞)에 기초하여 생겨나고 허위를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다. 허위를 파괴하는 것은 생명의 힘이다. 생명의 힘으로서만 허위를 이긴다. 그러므로 섹스가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섹스보다 더한 자연을 발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자연에서는 쉽게 감동을 느끼면서도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가장 신비로운 자연인 섹스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대자연을 보며 아름다움과 경외심을 느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 섹스 때문이다. 온갖 푸른빛으로 깊게 우거진 숲은 한시도 쉬지 않고 섹스를 하고 있다. 싹을 틔워 자라나고 가지와 잎을 뻗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오로지 번식을 위한 움직임이다. 눈부신 꽃송이들은 인체로 치면 성기에 해당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감동적인 동물의 세계, 물살을 거스르는 연어들의 눈물겨운 역동과 알을 낳기 위해 바다를 떠나 육지로 올라오는 바다거북의 경이로운 여행도 모두 섹스의 에너지다.
대자연이 우리의 숨결을 달래주고 순수한 기쁨과 평화를 주는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고 그 생명의 힘이 곧 섹스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가 섹스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는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주에 속한 생명체로서 마땅히 나 자신에게 부여된 자연을 온전하게 지키고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채털리 부인의 연인> 전무후무한 이 명작이 우리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는 비인간화된 자본주의에 맞서 생명과 섹스와 신성(神聖)이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되는 곳에서 비로소 회복되는 참된 인간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