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고양이나 개를 가리켜 ‘나와 가장 깊게 소통하는 생명체’라고 고백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이 미혼이거나 가족이 없어서도 아니고 인간관계에 서툴러서도 아니다.
말이 아니라 감각으로 소통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했다. 배를 맞대고 가만히 서로의 숨결을 교환하거나, 한없이 눈동자를 바라보거나, 오랫동안 천천히 쓰다듬거나 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뛰어넘는 교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러니 한편으론 서글퍼진다. 인간은 뭐가 모자라서 동물과도 하는 그 깊은 소통을 못하고 살까?
사실 모자라서가 아니다. 넘쳐서 그렇다. 넘치다 보니 바쁘다.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으니 모든 게 빨라진다.
광화문 교보생명 본관 전면에 설치된 글판에 소개된 뒤 폭발적 인기를 끌며 만인의 공감을 받은 시가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오랜 시간을 두고 자세히 보면 누구나 사랑스럽다는 이 단순한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본다’는 행위가 얼마나 빠르게 처리되고 있는지,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반증한다. 하긴 시간은 비용이며 경쟁력이니까 빨리 결정하고 빨리 진행해서 빨리 성과를 내야 하겠지. 입학이나 취직 면접에서 한 인간을 불과 2~3분 본 걸로 판단해버리는 상황에 우리는 얼마나 절망했던가. 절망만 하고 있을 수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르게’ 인정받을 방법으로 학벌과 외모를 내세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학벌주의와 외모지상주의의 원인은 세상의 이 미친 속도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질주하는 세상을 향해 우리가 외치고 싶었던 말을 <풀꽃>이라는 시가 대신해준 것이다. 나를 잠깐 본 것만으로 빠르게 판단하지 말아 달라고, 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까지 오랫동안 자세히 보아달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토록 깊은 소통을 원하고 있다. 깊은 소통에 목말라 있다.
섹스는 이론상으로는 타인과 내가 이룰 수 있는 가장 깊은 소통이다. 타인 앞에서 나의 모든 겉치레를 걷어내고 가장 은밀한 곳을 열고 남의 몸을 내 몸처럼 받아들인다. 상대의 숨결을 호흡하고 같은 리듬을 타고 서로의 에너지를 결합하여 하나의 경험을 공유한다.
문제는 현실에선 이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섹스 때문에 더 외로워지고 더 단절되어 아예 견고한 벽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경우 애초부터 섹스에 대한 접근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섹스를 욕망의 성취로 삼거나 욕망의 출구로 사용하면 결코 소통할 수 없다. 이때 상대는 그저 하나의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 소통은커녕 모욕이 된다.
섹스는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다.
섹스를 하기 위해 상대를 만나는 게 아니라
상대와 깊이 만나기 위해 섹스를 하는 것이다.
상대를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을 파악하고 내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더 강하게 결속한다는 뜻도 아니다.
진정한 만남은 ‘통과’다.
어떤 사람을 깊이 만난다는 건 그 존재를 통과하여 내 존재의 궁극과 만나는 일이다.
그 궁극에서 상대와 나는 저절로 하나가 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신성(神性)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에서 신을 ‘빛’이라고 표현한다. 화려해서 빛이 아니라 나를 밝히 비추어 나의 참 자아를 드러내기에 빛이다.
하지만 신은 따로 없다. 우리 각자가 신이고 빛이다.
존재의 빛을 서로가 서로에게 비추는 일,
이것은 누군가를 말없이 오랫동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사람들끼리는 이게 좀 어렵다. 대부분 어색해 한다.
말하지 않고 건드리지도 않고 사진도 찍지 않고 커피를 홀짝거리지도 않고 낄낄 웃지도 않으면서 다만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오로지 보기만 하는 일은 익숙하지 않다.
바쁘고 복잡한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다.
오히려 동물들과 더 깊은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말없이 마주 보고 5분만 넘길 수 있어도 상당한 집중력이고 10분 정도 유지할 수 있다면 칭찬받을만하다.
이렇게 보는 것을 ‘응시(凝視)’라고 칭하자. 영어의 뉘앙스로는 ‘See’도 ‘Look’도 ‘Watch’도 아니다. ‘Gaze’가 가장 근접하다.
눈길과 마음을 모으는 일이다. 하지만 대상을 향해 나의 시선을 쏘지 않는다.
시선은 눈길, 말 그대로 '눈의 길'이니 통로일 뿐, 그 길을 통해 대상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언뜻 생각하면 부부나 연인이 서로 마주 볼 기회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생겨날 것 같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한창 열애 중일 때가 아니면 흔치 않다. 그래서 그냥 눈만 맞추는 것일 뿐인데도 사람에 따라서는 굉장히 거북하게 느끼면서 그 상황을 피하려 한다.
작정하고 하는 게 어렵다면 자연스러운 기회를 만들어보도록 하자. 거실에서 차를 마시다 눈길이 마주친다면 게임을 하듯 그대로 10분을 있어 보자고 제안하고 타이머를 맞춰놓을 수 있겠다. 또는 자기 전 편안히 누워서 마주 보았을 때 해보는 것도 괜찮다.
그러나 서로 마음을 맞추어 작은 의식으로 해보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 공간을 깨끗이 정돈한다.
- 두 사람이 편안한 자세로 마주 앉는다. 침대 위나 바닥, 혹은 의자 모두 가능하다.
- 두 손을 맞잡는다. 편하게 잡아도 되지만 다음과 같은 방식을 추천한다.
남자 손을 아래에 두고 여자 손을 얹는다.
여자의 엄지가 남자의 검지와 중지 사이로 들어가게 하여 손바닥을 가볍게 밀착시킨다.
- 타이머를 맞추고 10분 동안 서로를 응시한다.
아마도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집중하는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불과 10분 안에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긴다. 그 특별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만일 안다고 해도 미리 알려주면 특별해지지 않으니 알려줄 수 없겠지만, 사실은 모른다. 일종의 예술적 감동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 간단한 의식을 ‘Transfiguration’이라고 부른다.
트랜스피겨레이션, 직역하면 ‘변형’, 즉 모습이 바뀐다는 뜻이다.
아주 쉬운 예로, 첫눈에는 못생겨 보인 사람이라도 그의 사고방식이나 철학, 사는 모습이 대단히 멋지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누구에게나 깃들어 있는 신성이 고요한 응시를 통해 느껴질 것이다.
상대의 신성과 나의 신성이 서로에게 경배하는 순간이 생겨나고
그 결과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Transfiguration은 두 사람의 시너지 때문에 명상보다 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결과를 일으킨다.
하지만 명상과 마찬가지로 의도를 덜어내고 지나치게 노력하지 않아야 한다.
외형을 보지만 외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외형 너머의 것을 이해하려고 일부러 애쓸 필요는 없다. 변형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어떠한 변형이 생겨나든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이것을 섹시한 놀이로 제안하고 싶다. 가끔은 침대 위에 앉아 이 의식을 치른 다음 섹스를 해보면 좋겠다. 섹스는 유희이기도 해서 늘 하던 방식을 벗어나 색다르게 하면 좋은데, 이렇게 고요한 10분이 기대 이상으로 굉장히 섹시한 놀이가 될 거라고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