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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by 행복해지리



글 쓴다며~ 축하해
결국엔 읽는 삶이 아닌 쓰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대단해


오랜만에 마주한 선배의 칭찬과 격려에 머쓱해진다.

나의 쓰는 활동이 '글을 쓴다'는 말의 격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열없었다.

그래서 '글이라고 말하기 힘들고 그저 쓰고 있어요' 라고 밖에 답하지 못했다.


뭐든 쓴다는 거자나.
꾸준히 쓰고 있다는 거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를 써서 나아가는 거잖아.
자기는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된 거야.






그건 사실이다.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이 되었다.

편하게 읽기만 하다가 고통스럽게 쓰는 사람이 되었다.



읽기만 하던 시절에는 생각 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니 편했다.

굳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비판적 사고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봤고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으로 손쉽게 삶았다.

그들이 갖춘 통찰력이 부러워하기 했지만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세상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현실에서 고민이 생기면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고 책에 기댔다.

손쉽게 책 속에 담긴 위로와 조언들을 내 삶에 적용하며 변화를 꿈꿨다.


하지만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기에 맞춤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말은 충분한 조언이 될 수는 있었지만 고스란히 내 삶이 될 순 없었다.

읽기만 해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던 무렵 쓰기가 시작된 거 같다.


사실 쓰기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어려서부터 뭐든 끄적였으니깐.

때로는 일기장에 때로는 수첩에 스치는 생각들을 낚아채 모셔두었다.

하지만 글이라 할 수 없는 거칠고 날것의 글자들 뿐이었다.


목적 없는 끄적임이 글쓰기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작년부터다.

일과 육아 사이 시간에 쫓기는 쳇바퀴에서 잠시 내려온 휴직 기간 동안 운명처럼 글쓰기가 보였다.

도서관 문화 강좌에서 글쓰기 강좌를 보고 시선이 머무는 걸 보고 내 안의 욕구를 알아보게 되었다.


단순한 끄적임이 아닌 세상에 내놓아도 되는 글을 쓰고 싶은 거구나.


망설임 없이 신청했지만 1시간짜리 강연을 듣고 바로 글쓰기가 시작되지는 못했다.

시작은 했지만 쓰기를 이어가는 건 꾀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다.

쓰면 쓸수록 글의 담긴 무게감 때문에 작업이 더디기만 했다.

생각을 담아내는 위해 오랜 시간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연습도 필요했다.

글 다워야 한다는 내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이 기준은 우선 글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현실타협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도 견녀내야 한다.



그렇게 반년 넘게 잠을 줄여 만든 틈바구니에서 쓰기를 이어왔다.

(꽤 긴 시간이라 여겼는데 글로 옮겨 눈으로 보니 아직은 애송이였구나 자각한다. 이런 게 글쓰기의 매력이다. 자기 객관화)

이렇게 쓰는 사람이 되었다.

쓰는 사람으로 사는 동안 내 안에 독소 같은 걱정, 불안, 유감 들이 감정들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마음속에 담긴 생각을 깊게 성찰하면서 점차 뚜렷해지는 내 생각이란 것도 생겨났다.

쓰기 시작하면서 나를 글로 옮기기 위해 스스로에게 몰입하게 되었고 숨겨진 욕구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껏 책에 기대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던 읽는 사람은 내 생각과 목마름에 집중하고 그것들을 하나씩 이뤄가는 능동적인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당당히, 나를 쓰는 사람으로 명명한다.







(제목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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