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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그를 훔쳐본다.

by 행복해지리



우연이었다.

무심히 돌리던 시선이 필 그 남자 앞에 췄다.

그리고는 바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눈길 한번 준 것인데 불륜 저지르다 들키기라도 한듯 재른 것이다.

그도그럴것이 바로 옆에 남편이 있다.

에그머니나, 외간 남자를 쳐다보다니러워라.

하지만 단속도 잠시, 나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돌려 그에게 시선이 갔다.

당당하지 못할 건 없으나, 당당하지 못해서 조마조마하면서도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주책이다.
나 왜 이러는 거니 대체


나를 홀린 건 사람이 아니라 책이었다.

그는 책을 읽고 있었다.

고대 화석에나 등장하고 현재는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책 읽는 남자어른을 보고 있는 거다.

이런 희귀템을 눈앞에 마주하니 부끄러운 줄 모르고 시선이 머문다.

게다가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다음주 우리 북클럽 선정도서였다.

나도 읽고 있는 중이라 더 반가웠다.

반가움과 신기함이 어우러져서는 말 걸고 싶은 주접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이 책 어떠세요?
우리도 읽고 있어요.
우리라 함은 제가 속한 사브작 북클럽이예요.
책 읽는 어른 남자가 워낙 희귀해서 신기해요.
책 좋아하세요?
어머 제가 주책이죠.
죄송해요.
안녕히 계세요.
(속으로 생각만 하고 내뱉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분이 잠시 책을 내려놓길래 냉큼 사진을 찍어버렸다
원래 이렇게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어야 정상이거늘 그는 정말 희귀템이었다.
미쳤나보다. 이제는 도촬을 하고 있다니, 죄송해요 ㅠ






갑자기 20여 년 전 그가 떠오른다.

그도 책을 읽었다.

안타깝게도 명백히 과거형이다.


강의실에 일찍 오면 조용히 책을 꺼내 보던 그였다.

다 읽고 나면 내게 건넸다.

읽어보라고.

그가 주는 책은 바로 읽었다.

다읽고 같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좋았다.

진지하게 '오페라의 유령'을 읽고 나면 가볍게 볼 수 있는 '파페포포 메모리즈'를 주었다.

그가 주는 책은 내 취향과 상관없이 몰입해 읽었고 같이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시간을 쪼개가며 읽었다.



그랬던 그는 이제 없다.

(깊은 한숨)

잠시라도 책을 들면 손에 가시가 돋아나기라도 하는지 들어보지도 않는다.

재미있게 읽어서, 전공 서적이라 새로운 것이 많아서, 생각해 볼 만한 주제들이 많아서 종종 그에게 책을 추천하지만 대답은 없고 영혼없이 고개만 까닥거리고 만다.



낯선 외간 남자를 부끄러운 줄 모르고 훔쳐본 것은 그때의 그가 그리워서 였던 것 같다.

눈 앞에 그를 보며 그때의 그를 떠올려본다.

지금 이 순간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모습이 하일없이 아저씨다.

과거의 그를 소환하는 일은 실패다.


그 시절 그를 추억하고자,

다시 그를 보며 설레이고자 살며시 책을 쥐어줘본다.

그는 고대로 내려놓았다.

아구 인간아.





그와 함께 읽은 추억이 깃든 책은 여적 보관 중이다.



(제목사진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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