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파트 21층에 살아요.
덕분에 집을 나서기 위해 엘리베이터 이용은 불가결입니다.
매일 아침 비슷한 시간에 집을 나서면 내려가는 동안 늘 비슷한 분들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납니다.
가장 먼저 16층에서는 나란히 어린이집에 가는 남매와 엄마가 탑니다.
이어서 12층에서는 아침부터 곱게 화장까지 한 부지런한 여중생이 조용히 합류합니다.
10층에서는 늘 같은 서류 가방을 든 아저씨가 출근을 위해 엘리베이터에 오릅니다.
그리고 종종 병원에 가기 위해 7층 할아버지와 가족 한분(이 멤버는 랜덤입니다)이 타십니다.
이 분들과 자주 마주하지만 늘 데면데면한 채로 눈인사 정도만 건넨 후 좁은 공간의 어색한 공기를 나누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빠르게 각자의 길을 가곤 했습니다.
오늘 아침도 둘의 등교와 둘의 출근을 위해 네 식구가 엘리베이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가장 먼저 멈춘 곳이 새롭게 18층이었어요.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사람은 안 보이고 납작하게 접혀서도 현관 문짝 크기만 한 박스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려 들어옵니다.
엘리베이터 바깥에서는 박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미안합니다, 죄송해요'하는 목소리만 들려왔고요.
우리 가족은 순발력을 발휘해 둘씩 짝을 지어 양쪽벽으로 바짝 붙어 박스가 들어올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정확히 반으로 갈라놓은 박스가 다 들어온 후에야 아침부터 땀범벅이 된 가구 배송기사님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습니다.
탑승 후에도 계속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시고 우리 부부는 괜찮다며 답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6층에 멈췄습니다.
어린이집 가는 남매와 엄마가 있는 층입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도 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남편이 딸아이에게 '딸이 아빠 쪽으로 들어오자'하고 공간이 있음을 알리는 멘트를 날렸습니다.
그렇게 확보된 공간으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남매와 엄마가 탔고 다시 출발한 엘리베이터는 12층에서 멈췄습니다.
제 시선은 박스와 덩치 큰 배송 기사님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단아하게 단장한 여학생이 문 앞에 있을 겁니다.
이번엔 제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 엄마 쪽으로 바짝 들어오자'
이 말이 신호가 되어 배송 기사님도 한발짝 안쪽으로 더 들어오셨습니다.
여학생은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렇게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며 다시 엘리베이터는 내려갑니다.
다행히 오늘은 10층 아저씨는 출근을 하신 모양입니다.
10층을 지나쳐 더 내려가나 싶더니 7층에는 멈춰 섰습니다.
7층 할아버지는 항상 코에 튜브형 산소호흡기를 부착하고 계시기 때문에 가족 중 누군가가 산소통을 들고 동행합니다.
오늘은 그 역할이 며느리였던 모양입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탈 자리가 없다고 판단된 베트남에서 온 그녀는 서툴지만 천천히 '아버지 다음에 타요'라고 말하더군요.
15인승 엘리베이터이니 분명 여유 공간이 있을 텐데 싶어 두리번거렸습니다.
박스 반대편에는 남편 + 딸 + 16층 남매 + 16층 엄마가 있으니 도합 5입니다.
우리 쪽은 저 + 아들 + 배송기사님 + 여학생까지 4이지 이쪽이 더 공간을 만들기 유리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택한 방법이 몸을 구겨보는 겁니다.
튜브에 잔뜩 들어있는 바람을 빼면 표면이 쪼글쪼글해지듯 들숨에 숨을 멈추고 아들을 안고 최대한 몸은 움츠렀습니다.
신기하게 조금 공간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습니다.
숨먹의 효과를 느꼈는지 배송기사님이 한 발짝, 여학생이 한 발짝 뒷걸음질을 해서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할아버지와 며느님, 그리고 산소통까지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내려가는 동안 할아버지는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셨고 배송기사님은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주인이 없는 공용 공간이니 먼저 탔다고 해서 우리 가족의 것은 아닙니다.
함께 이용하는 것이니 조금씩 배려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자칫 박스로 인해 좁아졌다고 불평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스 덕에 오히려 소리내어 인사를 나눴습니다.
아침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만나면서도 늘 무관심하고 무뚝뚝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박스 덕분에 서로에게 소리 내어 마음을 나눈 겁니다.
1층에 도착했습니다.
내리는 건 탄 순서와 반대로 가장 나중 탄 사람부터입니다.
할아버지와 며느리, 그리고 산소통이 가장 먼저 내렸습니다.
뒤따라 등굣길 여학생이 내리고 어린이집에 갈 남매와 엄마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박스와 배송 기사님도 내리셨습니다.
모두들 '안녕히 다녀오세요,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등의 인사를 남기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내리고 나서야 한껏 참고 있던 숨을 쏟아내며 구겨진 몸을 펼쳤습니다.
사실 오늘은 어느 때보다 엘리베이터에서 서로에게 밀착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다 어색하지 않았어요.
눈인사만 나누는 것보다 소리 내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어색함을 몰아낸 비결일까요?
아침부터 한껏 구겨졌던 몸을 펼치며 출근합니다.
내일부터는 엘리베이터에서 소리내어 인사를 건네봐야겠다며 결심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