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게 토한 그놈

by 행복해지리




하도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그날 면상에 대고 욕을 해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된다.

비행기에서 내게 토한 그놈에게



인천을 출발해서 10시간의 비행 끝에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8시간을 체류한 후 현지 시간 새벽 2시에 조지아 티빌리시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출국 전날에서야 겨우 짐을 꾸릴 수 있을 만큼 몇 주간 일을 몰아서 해내고 출발했기에 설렘보다 피곤함이 더 우세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름도 낯선 나라, 조지아로 향한다. 충분히 좋았다.

1시간 후 상황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아니, 그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나)





이런 시간에도 기내식을 주는구나

게다가 맛있구나

이게 또 들어가는구나

약 19시간 동안 때마다 끼니를 먹어댔으나 움직인 건 몇 발자국이 안되기에 속이 더부룩했다.

근데 또 주는 건 다 먹는다.

낯선 나라 조지아의 음식이라는 기대감에 또 포크를 집어 들었다.

다시 생각하니 내가 타고 간 항공사는 튀르키예 소속이니 조지아 음식은 아니었겠다.

구운 토마토와 버섯을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와 함께 먹으니 맛있었다.

빵에 치즈 발라 먹어도 맛있고 야채 절인 것도 내 입맛에 맞았다.

암튼, 야무지게 기내식을 먹고 트빌리시에 도착할 꿈에 부풀던 그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꾸우웩 !

투..두.두.둑.둑 !


비행기에서 비가 내릴 것도 아닌데 내 머리카락을 느껴지는 터치감은 뭐란 말인가


복도 기준으로 양쪽으로 3열씩이 배치된 비행기였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현지인이 속이 불편해서 화장실을 가려다가 토를 분사한 것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르륵 토를 쏟아낸 것이 아니라 그나마 참으려고 고개를 돌리며 분사한 상태라 적은 양이 흩어지면서 떨어졌다.

복도 쪽에 앉은 나와 내 왼쪽, 그리고 더 왼쪽에 앉은 사람까지 3명에게 집중 분사되었다.



한박지 뒤늦게 상황이 파악됐다.

욕을 했어야 했다.

이제 생각하니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아마도 내 왼쪽, 그리고 더 왼쪽 앉은 두 청년 영향이었던 것 같다.

이 순둥이들이 보고 있던 책과 본인들 옷으로 토가 엄청 떨어졌음에도 연신 괜찮다며 차분히 자기 주변을 조용히 수습하는데 집중하는 게 아닌가.

아니 왜케 덤덤해?

너네가 현지 말로 화를 내야지.

같은 피해자가 이렇게 상황을 받아들이니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동화되어 승무원이 준 스팀타월로 연신 머리카락만 닦아냈다.

고작 내가 외친 건 스팀타월을 더 달라는 말 뿐이었다.

튀르키예 상공인지, 조지아 상공인지 모를 어딘가에서



승무원과 항공사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며 그들은 내게 땅콩 몇 봉지를 건넸다

나 땅콩 싫어하는데



머리카락이 떡졌을지라도 할 건 해야지. 도착 인증샷



상상치 못한 참사로 난 세상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조지아에 도착했다.

얼마나 재미있을라고 시작부터 이렇게 초강력 에피소드를 선사는 건지 두고 볼 거다.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

반가워 조지아.

보고싶었어 트빌리시.



토 테러로 시작했지만 조지아에 머문 시간은 모두 좋았다 I ♡ TBLLISI



* 여행이야기가 바닥날때까지 토요일에 글을 발행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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