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하세요"
옛말은 옳구나.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더냐.
남 걱정이 지나쳐 선을 넘으면서 고스란히 오지랖이 되었다.
너나 잘하라는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누군가의 걱정을 듣고 진지하게 대응해야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내가 성의 있게 인간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자기 만족이었을 거다.
염려라고 생각했던 내 걱정들은 그저 참견이었다.
뼈를 맞고야 멈췄다.
멈추니 보인다.
내 것도 온전치 않음을.
그동안 남의 삶에 끼어들어 시간을 허비했구나 의식하고 나니 다시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를 살피자.
오지랖을 펄럭일 시간을 내게 집중하자 결심했다.
우선 사람이 좋아 뻗어놓았던 관심을 걷어내야 했다.
그리기 위해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줄였다.
그리고는 걱정이라는 허울을 내세워 참견하던 에너지를 내게 쏟았다.
소홀했던 브런치 글쓰기를 이어가고, ME브랜딩을 더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동안 침체기를 겪은 글쓰기를 이어가기 위해 연재를 시작했고 사이사이 일주일에 한 개라도 글을 더 쓰려 노력했다.
3년이 다 되어가는 내 블로그에도 정성을 들였다.
매일 글을 발행하면서 조회수를 분석해서 글의 방향성을 뾰족하게 다듬었다.
그랬더니 블로그 이웃이 한 달 사이 1,000명이 늘어나는 성과도 보였다.
너나 잘하라 했을 때 처음엔 울었다.
속상했으니.
그리고는 분노했다.
서운했었다.
다시 차분해지길래 잊은 줄 알았는데 기어이 한 번씩 생각 냈다.
괘씸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말대꾸하듯 '그래 나나 잘할게' 하는 반항적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면 고맙다.
알고 보니 너나 잘하라는 말은 찐 조언이었구나 싶다.
스스로도 성숙하지 못하거늘 누구에게 참견하고 무얼 조언한단 말인가.
나이 마흔 중반이 돼서야 나를 살피고 겸손해지는 것을 배웠다.
교만하지 않고 내게 집중하는 것이 겸손이고,
그것이 나를 살찌우는 방법이다.
오늘도 나와 내 가족을 본다.
그것을 두루 살펴 보살피는 것에 집중한다.
뼈맞고 깨달은 결심이다.
(제목사진 : 영화 '친절한 금자씨'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