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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Aug 06. 2024

아빠!  엄마가 가출했어

 


지난주 연수를 듣고 있는데 남편에게 글 없는 사진 톡이 왔습니다.

익숙한 이미지.

아들내미가 또 몰래 게임을 쳐! 하셨네요.

기가 찹니다.

자동으로 게임이 돌려놓아서 시간이 늘어난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시간입니다.

한 달 정도 이리 산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로 주말에만 하긴 했습니다, 이런 걸로 위안을 삼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아이가 잠들고 난 후에도 1-2시간 정도는 방을 들여다보고 자는지 확인을 했답니다.

그런데 대체 언제 게임을 했을까요?

물어보니 (그 와중에 대답은 잘하지요) 새벽에 5시쯤 일어나서 하셨답니다.

알람을 안 해도 게임하겠다고 생각하고 자면 눈이 떠진 답니다.

그 정성에 절로 박수가 나옵니다.

태블릿 피씨에 비번이 걸려있었지만 (비번만 있고 밤시간 잠금장치가 없었던 게 화근입니다) 몰래 비번을 기억했다가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평소에는 모르는 척 늘 필요할 때마다 비번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정성을 보이셨습니다.





 

저는 화가 나고 억울한 생각까지 들어서 미치고 팔짝 뛰겠더군요.

그런데 남편은 참 차분했습니다.

본인도 게임을 좋아해서 인지 오히려 아이를 이해해 가며 잘 구슬려서 대화로 원하는 정보를 모두 알아냈습니다.

저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욕이 나올 듯해서 베개 끌어안고 그 속에 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습니다.

매달 들어가는 돈이 정말 허리를 휘청이게 합니다.

검사 결과 예상키가 160 초반이 나와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알면서 안 자고 게임을 했다는 게 저로써는 이해도 안 되고 배신감 마저 들었습니다.

아빠랑 대화를 끝내고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제 곁을 아이가 어슬렁 거립니다.

눈치를 보는 게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밴댕이 속알딱지 애미는 말을 섞으면 좋은 말이 나가지 못할 테니 차라리 입을 다물었습니다.

저녁밥상을 차려놓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딸아이가 와서 '엄마는 저녁 안 먹어~?' 묻는데 '엄마는 집 나가버릴 거야. '라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렸습니다.

사실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그냥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 열을 좀 식히고 있었는데 심심하면 만지작 거리는 휴대전화가 없다는 것을 그때가 알았습니다.

아마도 차에서 내비게이션으로 사용하고 그대로 두고 나온 모양입니다.

핑계김에 바람 쐴 겸 말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지하 2층 주차장에서 핸드폰을 찾아 그대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은 21층입니다.

평소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는지라 기회가 되면 계단으로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10분도 더 걸리던 것이 지금은 5분 정도면 올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도 가라앉힐 겸 한 칸 한 칸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집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엄마가 진짜 집을 나갔다면서.

아들은 놀라서 울기 시작했고, 아빠한테 빨리 나가보라고 했다는 겁니다.

지하 2층에서 1층 현관을 지나 2층으로 가려는 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남편과 마주쳤습니다.

남편은 제 가출을 믿는 얼굴이었고요, 멀리 안 가서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더군요.  

그리고는 불안에 떠는 아들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나 핸드폰 찾으러 왔는데' 하며 폰을 흔들어대니 그제야 웃습니다.



그 자리에서 남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남편은 사춘기 남자아이들은 뇌가 단순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 행동이 다르다며 이해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라고 하더군요.

스스로 통제가 안되니 관리 밖에는 답이 없다면서요.

그래도 엄마 마음 아프게 한 건 사과하라고 했으니 이야기 잘해보라는 말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짧은 가출 끝.



집에 돌아오니 엄마의 가출로 놀랐던 아들이 안심합니다.

제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안방 밖에서 서성이더니 헛기침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는 방으로 들어오더 군요.  

그리고는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꼭 안아줬습니다.

그리고는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다독여줬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믿고 싶어. 너희 행동을 의심하고 감시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많이 속상했어. "


그렇게 아름답게 마무리되나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용서의 말에 긴장이 풀렸는지 이제는 꺼이꺼이 울면서 아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엄마, 근데 패드로만 게임한 거 아니야. 엄마 노트북으로도 많이 했어. 그것도 미안해. "

순간, 감동을 모두 사라지고 한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겨우 참았습니다.

( •︠ˍ•︡ )

 


며칠 뒤 마음이 모두 가라앉았습니다.

아이는 아주 평온하다 못해 깨발랄합니다.  

다행히 디지털 디톡스 하겠다는 마음은 성실히 실천 중입니다.

차분히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 사건이야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아이가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다 표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 안 해도 되는 비밀까지 모두 말해주었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안전할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던 덕분입니다.


* 아이와의 대화에서 당위성을 전제로 이야기하면 아이는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부모가 받을 줄 것이다라는 안전이 확보되어야 대화가 이뤄집니다.


다행입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크는 거겠죠.

사춘기 아이들은 항시 추락 위험을 안고 삽니다.

부모는 다만 안전 그물망을 튼튼히 쳐놓고 다치지 않도록 지켜볼 뿐입니다.

건강한 안전 그물망을 가진 아이는 한 번씩 추락할 수는 있어도 그대로 땅으로 곤두박히는 일은 없습니다.

결국 정서가 답입니다.

이렇게 자라납니다.

 




관리가 허술했던 점을 반성하고 모든 전자기기 점검을 마쳤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블로그에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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