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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해지리 Nov 25. 2024

넌 내게 굴욕을 줬어

아니 노안을 줬지




머리만 대면 그대도 잠드는 편리하고 감사한 수면 시스템을 타고났다.

본디 잘 잔다.

특별히 꿈을 꾸지도 않고, 다만 웅크린 자세 잠들었다가 기절한 듯 깨는 편이다.

그런 나를  아침에 보면 동생은 늘 비슷하게 묻곤 했다.


"언니, 악몽 꿨어? "


곤히 자고 일어난 내게 왜 이렇게 묻는가 했더니 내가 상당히 심하게 인상을 쓰고 잔다고 한다.

굳이 눈썹 사이 내천자 주름이 잡힐 정도로.

그렇구나.

어려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뭐가 대수냐 싶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인상쓰는 습관을 유지하는 동안 나이보다 훨씬 일찍 이마 사이에 주름이 자리 잡았다.

손으로 매만지면 제법 골이 느껴질 만큼 깊고 굵은 세로 주름이 패인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인상을 쓰면 눈썹 사이 주름이 잡히는 것 촉각처럼 느껴고, 그럴 때면 나도 모르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눈썹을  벌려주 다림질 하듯 주름을 펴보려고  숱하게 노력 했다.

보람 없음을 알면서도.


학교에서의 일상은 반은 수업, 반은 업무다.

교실에서 수업할 때에는 비교적 넓은 공간을 보며 눈이 쉴 수 있지만 업무를 할 때에는 약 50cm 미터 정도 떨어진 노트북과 1대1 눈싸움이 이어진다.

둘 사이에는 얇은 블루라이트 차단 보호필름 하나만 존재할 뿐 항시 팽팽하다.

쉼없이 서로를 노려본다.

퇴근하고도 눈싸움은 이어져서 부족한 수업 준비를 하기도 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최근에는 원고 교정으로 이어지는 출간작업이 더해져 눈싸움이 더 길어지곤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느꼈다.

모니터 글자가 조금씩 뿌옇게 보인다는 걸.  

눈싸움에 지기 싫은데.

인상을 써서 눈에 한껏 힘을 주면 그나마 좀 선명해보이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곤 했다.

그때마다 다시금 눈썹 사이에 세로주름이 더욱 강력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두 손은 자판기에 묶여 있으니 주름을 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감내하는 수밖에.

눈썹사이에 내천이 흐르도록.


그렇게 눈앞에 흐릿함에 답답하던 차였다.

딸아이가 드림렌즈를 착용하기 때문에 3개월에 한 번  안과 정기 검진을 가야 하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10분 거리 안과를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3개월이 아닌 5개월 만에 검진을 갔었다.

선생님께 혼날 각오를 하고 (앞서도 3개월이 아닌 이번과 비슷한 텀으로 오는 바람에 이미 혼난 경험이 있다) 병원 문을 열었다.

예약을 따로 받지 않는 병원이라서 가면 늘 대기가 짧아야 1시간, 보통은 2시간을 각오하고 가는 병원이다.

토요일 오전이라 사람이 많겠구나, 그런데 오픈런도 못했으니 망했다 생각하며 들어섰는데 대기실이 상당히 한갓졌다.

지금껏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

딸아이 접수를 하면서 데스크 선생님께 여쭤보니 오늘은 대기가 30분도 채 안 걸릴 것 같다는 희소식에 재빨리 내 접수까지 밀어 넣었다.

눈앞이 흐릿한 답답함을 해소할 방법을 의사 선생님께 알아봐야 했다.

딸아이와 나란히 이런저런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로 입장.

역시나 기대한 대로 기한을 넘겨 왔다고 한 꾸중을 듣고 나서 렌즈관리는 아주 잘했다는 칭찬도 들었다.

처음에 아이 성장에 맞춰 1년에 한 번은 고가의 렌즈를 바꿔야 할 거라고 하셨었는데 1년 9개월이 된 지금도 시력도 잘 유지되고, 렌즈 관리도 잘되고 있고, 아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니 또 한 번 유예기간을 주시겠다는 반가운 소식도 주셨다.

돈 굳었다.

그리고 내 진료.

앞서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몇 가지 문진을 더 하셨다.

그리고는 안경처방전을 내밀다 말고 멈추신다.

굳이? 라면서

검사 결과를 보면 시력은 여전히 1.0을 유지하고 있단다.

그런데 전에는 아주 선명하게 보이던 것이 다소 흐릿하게 보이는 정도인데 굳이 안경을 쓸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는 것.

사실 흐릿함의 정도가 일상생활에는 지정이 없고, 모니터를 보는 것에도 큰 문제까지는 아니었고, 다만 내 주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정도다.

더 이상 주름을 깊게 만들기는 싫고, 두 손을 키보드에서 해방시킬 수도 없으니 안경을 끼면 좀 편해지려니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요정도 불편함을 위해 굳이 돈 들여 안경을 쓰고 개선되는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는 것.

보이는 글자가 다소 흐릿해진 것은 아주 당연하게 노안의 과정이니 그냥 받아들이란다.

학(헉을 넘어 학이다), 노안.

지금 겪는 불편함은 노안이 오면 점차 안구의 초점 맞추는 힘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니 그냥 받아들이고 사는 게 편하다고 하셨다.

안경을 쓰면서 발생하는 불편함이 오히려 더 클 것이라는 것.

노안을 인정하기 싫어서 좀 심술이 낫지만 맞는 말씀이라 맞받아칠 말이 궁색했다.

하릴없이 고개만 주억거리고 진료실을 나왔다.


눈이 침침한 것이 싫었던 것인지,

그저 평생 렌즈는 커녕 안경 한번 껴본 적이 없어서 작가인양 안경이 탐 난 것인지

노안을 인정하기에 아직은 아니지 않은가 싶은 반항심이지 뭔지 모를 굴욕감을 느끼며 병원을 나왔다.


아무튼 지난여름과 가을을 거쳐 출간 작업에 몰두하면서 더 많이, 더 늦게까지 모니터와 눈싸움하면서 안타깝게도 노안이 찾아왔다.

출간은 내게 노안을, 아니 굴욕을 주었다.

눈을 내어주고 책이 남았으니 이문이 남는 장사인가 아닌가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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