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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차 Mar 10. 2020

라디오에 대하여

다시 내 이름을 불러주면*

라디오를 켠다. 세상 모든 게 바뀌어도 어떤 모든 세상은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파수를 맞추고 심야의 방송을 듣는다. 거기에는 느낌을 강요하는 자막이 없다. 압도적인 스케일과 피곤을 감추는 메이크업도 없다.

"세상 모든 게 바뀌어도 어떤 모든 세상은 그 자리에 있기를"

외로운 시기에는 라디오를 들었다. 타블로나 종현은 나의 한 시기를 지켜 준 목소리다. 둘은 멋진 DJ였다. 그들은 내 취향을 만든 음악을 들려줬고, 아픔을 알았으며, 무엇보다 감성적이었다. 타인의 마음에 대한 민감함이야말로 DJ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라디오에는 무수한 사연이 날아드니까. 사연을 듣는 동안 열린 마음의 틈으로 어설픈 위로를 입혀 버릴 수는 없으니까. 저마다의 이야기에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있다.


오후의 깔깔거리는 라디오도 좋지만 내가 사랑하는 시간대는 하루의 일과가 완전히 끝난 때다. 열 시부터 열두 시까지, 그리고 어제와 오늘을 잇는 새벽 두 시까지의 라디오. 나는 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에 조용한 공간에서 이어폰을 찾는다. 일기를 쓰거나 노래 제목을 종이 귀퉁이에 옮기거나 녹음을 하거나 술을 마시기도 한다. 나를 찾는 사람이 없으므로 온전히 자유롭다. 편안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남몰래 위로를 얻는다.


사연을 보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우물정을 붙여 짧은 메시지를 보낸 적은 있지만 소개된 적은 없다. 그래서 나의 존재는 DJ도 방송작가도 다른 청취자도 모른다. 주파수 어디에도 채널 게시판에도 남아 있지 않다. 라디오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도 그럴 것 같다. 나는 적극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청취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쩌다 같은 시간 같은 방송을 들었던 사람을 만난다면 퍽 반가워 많은 말들을 물어볼 것 같다.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진행자가 바뀌면 방송을 듣는 느낌이 달라진다. 진행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낯선 사람과 친밀한 사람의 느낌 차이에 가깝다. 그러니까, 라디오에도 이별이 있다. 이별에 의해 한 시기가 저문다. 함께 나눴던 기억의 문이 닫힌다. 그 시간들은 누군가 다시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 마음 속에서 천천히 저문다. 이별은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아끼는 DJ는 이렇게 인사말을 남겼다. “(다시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그 생각을 하면서 견딜 겁니다.”

*〈문배동 단골집〉의 가사. https://www.youtube.com/watch?v=7Y-YRvJ-UQ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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