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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첫차 May 10. 2020

다시 시작

나의 고유한 기쁨을 위하여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다. 시작의 뒤에 중간이 오고 중간의 다음에는 끝이 따른다. 한 편의 이야기에는 하나 이상의 위기와 그에 대응하는 인물의 선택이 담긴다. 완결된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런데 게으르고 나약한 우리의 도전은 끝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인생은 볼품없이 흩어져 있다. 나의 스케줄러는 수많은 미완성으로 가득하다. 나는 생각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인생을 바꾸겠다는 수많은 결심은 겨우 시작에서 그친다.


이해할 수 있다. 의지는 결코 단련되지 않으며 소모될 뿐이다. 생각한 만큼의 반만 해도 잘한 거라고 위로할 만하다. 자신에게 실망할 필요 또한 없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 켜진 채로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모바일 디바이스와 같을지 모른다. 날것 그대로 뒤엉킨 감정의 몸뚱이들, 과거에 멈춘 채로 웅크린 꿈들, 늘 염두에 두고 처리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 내 몸은 그것들을 모두 껴안고 돌부리가 채이는 흙길을 걸어간다.


멈춤, 비움, 채움. 휴식의 가치가 주목받는 이유는 우리가 충분히 지쳤기 때문이다. 확인을 요구하는 밀린 알림과 관심을 끊어도 어쩔 수 없이 듣게 되는 뉴스들로 우리의 몸과 마음은 피로하다.


잠시 냉장고를 떠올려 보자. 냉장고는 집에서 가장 피곤한 가전이다. 세탁기도 격렬한 운동을 끝낸 뒤에는 하루이틀 정도 쉴 수 있다. 에어컨에게는 기나긴 겨울잠이 있다. 그러나 냉장고는 마음대로 꺼질 수 없다. 냉장이 멈추면 우유가 상하고 반찬들도 맛이 변해 버릴 거다. 냉장고에는 우리가 채운 음식만큼의 책임감이 있다.


힘든 사람은 왜 바다를 찾는가. 바다에 가면 수평선과 바닷바람이 마음을 씻어 주지만 파도 소리는 그냥 나는 것이 아니다. 파도는 쉬지 못하고 시달린다. 떠밀리고 엎어지며, 쓸려가고 밀려온다. 인간도 비슷한 운명을 타고 났다. 시지포스 신화처럼 한 시기의 끝은 다른 시기의 시작으로 바로 이어진다. 끝은 끝에만 있다. 우리가 말하는 삶의 고비는 전환점에 불과하다.


우리는 완전히 비워질 수 없는 컵이다. 숨 쉬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과거를 지워내고 현재에 온전히 머물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명상에 쓸 시간은 한정적이다. 명상이 끝나면 밥 먹고 잠 자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많은 이들이 현실로부터 도피해 자신을 숨기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러므로 시작만큼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이 아닐까 싶다. 일상이 가져오는 지리멸렬함의 끝에 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지 덮인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


어느 뮤지션은 가장 짧은 다시 시작의 순간을 한숨이라고 말했다. 작업은 언제나 쉽사리 꼬여 버린다. 그러면 긴 한숨을 내쉰다. 들숨의 사이로 의지가 함께 들어온다. 다시 일을 붙잡고 일을 풀어갈 실마리를 찾는다. 여덟 시간이 걸리는 긴 다시 시작은 수면이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의지와 기운이 생긴다.


커피나 가벼운 대화도 같은 역할을 한다. 술과 담배는 건강을 망가뜨리지만 저렴한 노동 재생산의 수단이 된다. 어느 프로파일러는 동물이 나오는 비디오 클립을 넋 놓고 본다. 어느 부부는 뒷산을 올라 귀한 풀과 뿌리를 캔다. 어느 나이 든 주부는 말려 둔 꽃잎으로 차를 우려 마신다. 누구에게나 다시 시작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




얼마 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먹고 사는 일에 파묻혀 사는 동안 나의 글쓰기는 서랍 속 연필과 함께 잊혀가고 있었다. 이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읽고 쓰기 시작했다. 다섯 시에 눈을 뜬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책상에 앉는다. 출근 전까지 글을 쓰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채널에 발행한다. 그렇게 매일 글을 쓴다. 글쓰기가 전만큼 쉽지 않다. 술술 쓰이는 일은 거의 없고 무엇을 이야기할지 몰라 딴청을 피우기 일쑤다. 그래도 글을 쓰다 보면 마음에 고유한 기쁨이 피어난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글을 쓰는 생활의 축은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다. 그때는 내가 써 둔 글들이 내 등을 두드려 줄 거라고 생각한다. 계속 해도 좋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봐. 너는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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