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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Mar 12. 2022

언니야 봄이 온다

비정기적 우편함

1. 언니, 언니 나의 언니. 다 썩어버린 바나나 꼭지는 아무렇게나 묶고 있던 언니의 꽁지머리를 닮았어. 언니의 마른 어깨는 내 문진을 닮았고 언니가 쓰는 향수는 숲 같았는데. 지금은 언니가 없는 것보다 닮은 게 많은 일상이 어두워. 이제 방에는 언니 물건은 단 하나도 없는데 흔적이 왜 이렇게 가득할까.


언니 요새 나는 더운 공기가 두려워. 사실 여름이 다가오는 게 무서워. 작년 여름은 내가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내내 최악이었잖아. 봄 다음은 왜 하필 여름이어서. 내 여름에 진하게 흔적을 남긴 걔가 싫어. 걔 앞에서 벌벌 떨리는 손이 얼마나 멋이 없는지. 걔 이름이 화면에 딱 뜨는 순간 발밑이 무너지고 마는 것 같은 그런 게. 사랑이 특기인 애가 사랑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올까 궁금하다고 했던 언니 말 기억해? 경리단길이 얼마나 긴지 언니도 알지. 걔가 전화가 올 때면 전화가 끝날 때까지 그 길을 몇 번을 오르락내리락했는지 몰라. 통화가 끝나고 나서야 눅눅한 공기 밑에서 축축해진 등허리를 알아챌 정도로 바보가 되는 게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았거든 진짜로. 그런데 지금은 나를 불태우는 게 쉽지가 않아. 그래서 무서워 나는. 걔가 내 마지막이 되는 게 짜증이 나. 여름에 만난 사람한테는 냉정할 수가 없는 내가 이상해. 언니는 어떻게 했을까. 묻고 싶은데 언니가 없어서 내 목소리만 울리고 있는 오늘이 몇 개나 쌓이는지.


2.

마음 깊은 곳에서 끓는 것들이 식고 나서 고요하게 돌아보면 굳은 땅이 생긴다. 그 땅을 밟고 일어나면 또 걸을 힘이 생긴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또 변할 것이다. 변화가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면 그때 또 이야기하자. 그때까지 온전히 살아서 내일을 보면 안 될까. 혜야 날 찾아줘서 고마워. 손을 잡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내일 또 볼 수 있게 머리맡에 잠깐만 자다 갈게. 네가 뒤척일 때마다 놀라 깰 테지만 절대로 널 혼자 울게 두지 않을게.


3. 나는 다정하게 걱정할 방법을 모른다. 피가 몰려서 붉어진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부푼다. 피가 화르르 피가 파르르 한 층 두 층 끓었다. 화가 빠져나가고 나면 아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중에서 가장 큰 눈동자는 언제나 그랬듯 제이의 것이었다.


나는 나의 말이 제이를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으로 그을린 말이라 한들 그것을 무디게 하지는 못했다. 제이는 눈을 뜨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 알 수 없는 말을 흩뿌리면서 침대를 두들겼다. 문장은 정확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멍하니 제이의 주먹을 튕겨내는 침대를 보고 있었다. 병원 침대에는 스프링이 없는가 보다. 예전에 제이가 화를 내면 나곤 하던 지친 스프링 소리가 나지 않는다. 덜 시끄러웠다. 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는지 웃는지 분간할 수 없는 모양이라 처음에는 몰랐다. 눈물이 흐르고 있어서 제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우는 제이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병실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돌아서 나온 거리는 취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밤의 거리가 좋다. 취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걸으면 다 같이 끝을 향해 가는 것 같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겼다. 자꾸 제이의 우는 얼굴이 겹쳐서 보였다. 지금은 울음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집까지는 걷기로 했다. 도보로 1시간은 족히 넘는 거리다. 마음이 넘실거릴 때는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 30분을 꼬박 걸었다.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후회할 걸 알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을 걸 알았다. 도로는 내 이기심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마음끼리 부딪히면 아픈 소리가 난다. 그날 걷는 내내 도로는 시끄러웠다. 스프링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데도 나는 제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4. 올리브 동산의 날씨는 어떤가요. 여기는 갑자기 봄비가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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