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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Mar 24. 2022

올해 첫 꽃을 샀다

비정기적 우편함

1. 올해 첫 꽃을 샀다. 1, 2월은 늘 지난해의 자투리 달 같다. 연말에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줄지어 서서 13월, 14월쯤을 보내는 것처럼 잠잠히 겨울을 보내다 보면 갑작스럽게 봄이 온다. 그러면 부산스럽게 집을 새로 꾸미고 옷장 정리를 한다. 그리고 나면 꽃을 살 기분이 든다.


꽃집이 세상에 그렇게 많아도 꽃향기가 제일 가까운 곳은 지하철역이다. 을지로 지하상가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꽃집을 지나갈 때면 바쁘게 걷다가도 걸음이 늘어진다. 매번 달라지는 꽃들 앞에서 미적미적. 축축하게 톡 터지는 생화 향이 마스크 너머로 들이닥치니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오늘은 못 이기는 척 프리지아를 샀다.


노란색 프리지아가 참하다. 7000원이면 품에 가득 안을 수 있다. 꽃 가격은 누가 정하는지 궁금하다. 영자신문으로 돌돌 말린 프리지아를 품에 가득 안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서 내내 노랗게 번지는 향기를 손에 머금고 있으니 대책 없이 기분이 부풀었다. 화요일 저녁에도 지하철은 꽉 차 있었다. 좌석 사이에 끼어 앉아 꽃이 으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고 8개의 역을 지나갔다.


집에 도착해서 꽃의 줄기를 자르고 부엌 선반에 잠들어 있던 꽃병을 꺼냈다. 나란히 선 꽃줄기가 고개를 꼬고 책상 위로 올라갔다. 이른 봄을 준비하는 것은 날씨와 박자가 맞지 않아 추위에 떨었지만 그래도 괜찮은 날이었다. 최근 며칠을 모았을 때 가장 기분이 좋았던 날이라 기억하고 싶어졌다. 기억하고 싶은 것도, 기념하고 싶은 것도 없을 때는 내가 기억할 만한 것을, 기념할만한 것을 만들면 된다. 짧게 슬퍼하자. 누군가에게 들은 그 말이 요새 주로 내가 힘을 내는 발판이 된다.


2. 대가 없이 사랑해주세요.


3. 요새는 새벽에 잠을  자요 언니. 새벽  시쯤까지 몸을 뒤척거려요.   몸을 뒤척일 때마다 잠이  마디씩 달아나는 느낌이에요. 잡으려던 적도 없는데 저만치 도망가는  웃겨서 그냥 일어나 앉아서 이런 글을 쓰네요. 예전에는 감기는 눈꺼풀이 원망스러워서 미간에 힘을 줘가며 내려앉는 눈을 떴는데. 이제는 서로 멀어진 눈의 위아래 피부들이 멀뚱히 어둑한 천장 구석을 보고 있는 거예요. 마음이 깨끗해요. 언니랑 이야기할 때처럼 마음이 어지럽고 아프고 그러지도 않아요. 그냥 평온하고 잔잔하고 그래요.


언니는 내가 웃지 않을 때가 걱정된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언니가 없는 시간 대부분에 웃지 않고 있는  모르겠지요. 그렇지만 그런 말은 역시 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나요. 하지 못한 말들이 이제는  녹아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요. 언니가 남긴 앨범이나 목소리나 습관이나 이런 것들은 이제  것이 되어서 이젠 지울 수도 없고요. 언니는  있는 건가요? 끊긴 소식을 이을 방법은 없어서 나는 그냥  자리에 있어요. 가끔은 언니를 잊고 살고 가끔은 지독하게 그리워하면서 살아요. 내가 언니한테 남긴 것은 아마도 의자에 남은 와인색 얼룩. 그거 하나뿐일 텐데 말이에요.



4. 메일에 답장이 온 것은 일주일 만이었다. 메일의 제목은 [답장이 늦었지, 미안해]로 시작했다. 부러 잘 쓰지 않은 메일 주소를 사용해 보낸 메일이었다. 메일 주소로 나를 유추할 수 없고, 나도 그 메일을 자주 확인하지 않으리라는 작은 계산이 있었다.


나는 즉시 메일 알람을 꺼버렸다. 언제 S의 답장이 와도 모르도록. 알림을 끄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던 듯하다. 하루에 네다섯 번씩 메일 창을 들락날락하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조금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혹시 내가 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지는 않았나, 더는 이 메일 주소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닌가.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됐을 때쯤에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 답장이 아닌 나를 수신인으로 한 새로운 메일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너는 변했기를 바랐는데. S는 메일 답장을 보낼 때 항상 새로운 메일 창을 열어 이야기를 쓰곤 했다. 그건 답장이 아니잖아. 아냐, 내가 답을 보냈으니 답장인 거지. 떠오르지 않아도 될 기억까지 떠올라 뒤숭숭한 마음으로 나는 메일을 열었다. 나는 잘 지내. 첫 문장을 보고 바로 메일 창을 닫았다.


잘 지낸다는 말이 가끔은 배려 없는 인사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5. 나는 아직도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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