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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수풀 Apr 22. 2022

멸망의 소식이 들렸다

비정기적 우편함

1. 한라산 꼭대기는 하얀 나무가 가득했다. 눈이 덜 녹았나 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껍질이 말라붙은 폐목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그대로 굳어버린 듯 버석한 하얀 나무 떼가 눈에 밟혔다. 아래에는 군데군데 선명한 초록색의 관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백록담 바로 아래 생명이 끊긴 군락이 마치 목이 잘린 짐승 같아서 등줄기에 자잘하게 소름이 돋았다.


내려오는 내내 폐목이 되어버린 나무들이 마음에 걸려 인터넷을 뒤져봤다. 안타까운 소식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원래는 구상나무 군락지였단다. 한국에만 있는 사시사철 푸른 뾰족한 잎의 크리스마스트리라는 별명을 가진 멋진 군락지였다고.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기사와 연구가 빽빽하게 화면을 채웠다. 이상기후와 고온으로 나무가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 느닷없는 태풍과 장마 뜨거운 기온이 그들의 터전을 옥죄어 왔다.


멸종이 코앞이었다. 멸종이라는 말은 멀게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은 잔인하리만치 확실한 답을 냈다. 다음은 없군요. 없어진 것들을 지킬  있는 방법은 없으니까요.  곳이 사라진다는 기분은 언제나처럼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것이 되었다. 역사 속에서 물러나야 하는 마지막이 오면 인간은 어떤 인사를 할까요.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더워지는 날씨를 피해서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오르다가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어 말라죽어버린 나무들이. 험하게 부는 태풍 속에서 몸을 움츠리다가 목이 꺾인 나무들이 집단으로 죽어 있던 모습을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내내 흰 손으로 사람의 목을 쥐며 우는 나무의 꿈을 꾸었다.


2. 안녕, 너를 보내고 벌써 다섯 번째 여름이다.

녹슨 기타는 내 목을 몇 번이나 내리쳤었어. 이제는 아마도 그런 것들을 포함한 모든 너와의 이야기는 끝이 난 것 같아. 한동안은 네 심판대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젠 그런 것도 궁금하지 않아. 원하는 것들은 가졌니? 그랬다면 다행이다.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하여도 가진 적 없는 것이라면 슬프지 않잖아.


너는 오랫동안 슬펐으면 좋겠다는 내 소원이 이루어지려면 너는 영원히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해. 늘 잃을까 두려워하며 덜덜 떨다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네 안녕하지 못함을 기도해왔거든. 말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언젠가는 네 불행을 바라는 내가 역살을 맞을 수도 있겠지. 바람은 힘이 크니까. 그렇게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내가 네 옆에 뒹굴게 되어도 잘린 목에서 뿜어 나온 단말마는 그렇게 슬프진 않을 거야.


3. 변덕을 부리고 싶은 날이 있다. 집에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돌려서 청계천을 걸었다. 뒷걸음질 치다 보니 바로 봄이 잡혔다. 계절이 눈에 보일 정도로 투명해지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세상에 사람 손이 안 닿는 일이 없다. 계절은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인데도 꾸준히 매년 찾아오는 게 무섭기도 하다. 하루 만에 달라지는 공기는 괜히 사람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계절이 바뀌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 늘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용납되는 날이 있었다.


그날이 그랬다. 저녁 바람이 걷느라 열이 오른 뒤통수에 서늘한 기운을 선물했다. 봄바람에는 이상한 힘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앞에 두고 조용한 연주를 이어가는 연주자에게 만원을 넣어두고, 다 떨어진 꽃잎 때문에 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여전히 향긋한 꽃다발을 안고 걸었다. 코끝에 부벼지는 연두색 먼지를 몇 번 들이키고 나니 코에서는 이름 모를 콧노래가 나왔다. 그렇게 무릎이 아릴 때까지 무리해서 걸었다. 복잡한 길에서 사람들이 적어질 때쯤 다리가 아픈 것이 느껴졌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들어갈 때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집으로 들어갈 때는 급격히 짜증이 났다. 이래서 계절이 바뀌는 꼴이 싫다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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