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유리창에 거리 풍경이 보인다. 해가 진 도시의 색은 잿빛과 푸른빛, 어느 중간에 위치해있다. 그사이 소란하게 반짝이는 사람들. 점멸하는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꼭 지난 겨울의 유럽 여행이 떠오른다.
나는 자연보다 대도시를 좋아하는 여행자. 그는 꼭 별나라 같은 풍경으로 마치 천국이나 이계에 온 것 같은 기분을 주니 자연은 내게 있어 너무 자연스럽지 않다.
이것은 큰 문제가 된다. 내게 여행이란 언제나 그들의 일상에 나의 일상을 덧대보는 일이기에.
그러던 중 작년 겨울 혼자 떠난 두달의 여행에서 어떠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얻었다. 낯선 도시 어딘가서 새로운 일상을 지으며 살아가면 서울의 잿빛 도시 어느 구석보다야 행복할 것이라 어림했지만 아제나스 두 마르의 일몰 앞이든, 런던 세인트 존스 거리를 배회하든 사실은 전부 다 똑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세계 저마다의 풍경 앞에서도 사람들은 우는 눈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만 잠시의 쾌락을 행복으로 단정지으며 낯선 것을 멋진 것이다 착각할 뿐.
여행이 끝난 어느 순간, 장면 하나가 선물처럼 다가와 내게 말을 건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의 어디서든 행복은 없어."
온몸 구석구석 자리한 여행의 흔적에 오늘의 장면이 다시 덧붙는다. 복잡한 서울의 한 가운데서도 나는 파리의 센느강을 걷는다. 손쉽게 대서양의 어느 해변을 본다. 반짝이던 크리스마스 마켓의 불빛을 본다. 지구 반바퀴를 돌아 낯선 풍경을 헤메이지 않아도 나는 가장 행복한 순간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