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만남
영어가 안 되는 기사에게 사진 찍는 흉내를 내며 "라카포시"라고 말했습니다. 척 알아듣고 오른쪽 창 측에 앉으라고 합니다. 라카포시가 보이면 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르두어로 말하는데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짐작이지만….^^) 마음만 통하면 언어가 달라도 교류가 가능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일 겁니다. 두 시간쯤 달리자 함께 탄 승객들이 손가락질하며 라카포시를 보라고 일러줍니다. 캬아~ 라카포시다. 순백의 빙하…. 숨이 탁 막힙니다. 카메라를 프로그램 모드에 맞추어 두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무작정 셔터를 눌렀습니다. 케세라 쎄라~. 이것저것 계산할 틈이 없습니다. 이럴 때 펑크라도 나면 차를 업어 줄 텐데….
드디어 바람의 계곡 훈자에 도착했습니다. 산 중턱 마을 카리마바드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한마디로 설명이 어렵습니다. 땅거미는 지고 내일 주변을 돌아볼 생각에 기대 만빵. 제로 포인트에서 “올드 훈자 인”이 바로 근처라 쉽게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올드 훈자 인
카리마바드는 훈자 지역의 중심으로 경관이 뛰어나고 배낭여행자들이 묵을 만한 게스트 하우스가 많습니다. 7, 8월 성수기를 제외하면 방값도 싼 편이어서 한두 달씩 장기 체류를 하는 여행자들의 집합소 같은 곳입니다. (하루 5달러 미만으로 충분히 지낼 수 있음) “올드 훈자 인“은 카리마바드 지역의 여러 숙소 중 시설이 약간 부실한 대신 저녁 식사가 아주 훌륭합니다. 이곳에 투숙하지 않는 사람도 예약만 해두면 50루피에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샤워실이 있는 2인 1실의 하루 숙박료는 100루피.
사진의 할아버지는 올드 훈자 인의 주인장 랄 후세인씨, 그의 큰아들과 막내아들 레오. 가족들 모두 영어를 잘하여 일상적인 대화에는 문제가 없고 아주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퀴즈 하나. 훈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수 마을입니다. 사진을 보고 이 할아버지의 나이를 짐작해 보시기를…. (답은 파수로 떠나는 길에 알려드리겠음)
훈자에서 이틀째는 온종일 날씨가 변덕을 부렸습니다. 바람 계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다 멈추고, 비가 뿌리고 개이고를 반복합니다. 쿤제랍 패스가 막혔답니다. 올드 훈자인의 큰아들에게 파수의 상황을 전화로 물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쿤제랍 패스 구간이 개통은 되었지만, 내일이나 모래의 상황은 기상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니 딱 잘라 말하기 힘들답니다. 음~ 지체하지 말고 떠나는 것이 났겠다 싶었습니다.
큰아들이 쏘스트까지 차를 쓰라고 권합니다. 카리마바드에서 이틀 만에 떠나는 것이 아쉬웠던지라 함께 떠날 사람이 있다면 그러기로 했습니다. 과연 동행하여 차를 빌릴 사람이 나타날까요? 있으면 좋고, 없으면 혼자라도 떠나기로 작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역시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비수기 여행은 숙박이 편한 대신 동행자를 찾기에는 정말 불편합니다.
Jeep 차 렌트비 1,500루피를 혼자 감당케 된 것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훈자인의 작은아들 레오가 무료 가이드를 자청했습니다. 짐도 챙겨주고, 중국행 표를 예매해주고, 호텔도 잡아주고, 기사가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무보수 개인비서를 얻은 샘입니다.
레오가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직업이 머냐?” “이슬라마바드 대학에서 지질학을 공부해요.” “그런데 왜 학교에 안 가고?” “주말이라 집에 왔어요.” “너 그럼 20대냐?” “예 스물인데요.” “헥! 우리 아들과 동갑이네. 근데 왜 니네들은 나이가 짐작이 안 갈 만큼 팍 쉬었냐? 너의 아버지 나이는?" "아마도 51~2요." "뭣이라? 51??" "예~." “오마나…. 난 너의 아버지가 70은 된 줄 알았다.” “참 아저씨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나? 몇 살처럼 보이는데?” “30~35” “허허 그럼 내가 10살에 우리 아들을 낳았을 거라고 생각하냐? 이래 봬도 48년을 살았다.” 그때부터 레오는 나를 삼촌이라고 깍듯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그래…. 아주 귀여운 조카 녀석을 또 하나 얻었네.^^
인연, 그리고 낯선 전화...
조금 전,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인데... 이런 내용이 적혀있더군요.
웃비아님 중여동 게시판에서 글을 보게 되어 연락드립니다. 올드훈자인의 Leo가 예전에 사진을 보내주었던 Mr·Kim의 소식을 궁금해합니다. "Mr. Kim과 몇 번 연락하려고 했지만, 이메일 주소를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한번 연락해 보십시오. LEO의 이메일은 ****입니다.
레오를 알고 있는 분이 너무 신기해서 발신번호로 전화를 해보았죠. 아~ 작년에 파키스탄 훈자를 여행하고, "올드 훈자 인"에서 묵었던 분입니다. 제가 부쳐준 사진을 식당에 부쳐놓고 자랑을 하더랍니다. 아주 친절하고 좋은 한국 사람이라고…. 하하
통화가 끝나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세상 어디에선가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아주 사소한 인연이라도 서로를 그리워하고 축원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샛길로... 이슬람과 서양음악 ]
차가 저속으로 달릴 때면 (Fur Elise)가 나왔습니다. (이란에서도 차가 천천히 가면 음악이 나옵니다. 우리는 뒤로 가면 나오는데….) 띠리 띠리 띠리 띠리 띠 띠리리띠~ 레오는 그 멜로디가 나오면 꼭 따라 합니다. “너 저 음악 제목 알아?” “모르는데요.” “누가 작곡한 건지는 아냐?” “몰라요.” “정말 베토벤 몰라?” “몰라요.” “그럼 모차르트는 아니?” “모차르트가 머 하는 사람인데요?” 음~~ 심각하다. 파키스탄 대학생이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모른다면 서양식 음악 수업을 받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다른 분야의 음악을 공부하겠지만) “이 노래는 베토벤이라는 독일의 아주 유명한 귀머거리 작곡가가 테레제라는 처녀를 위해 만든 곡이다. 우리나라 아이들도 피아노를 배우면 꼭 저 곡을 연주한다.” 와우~ 이 어려운 이야기를 영어로 레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었다는 유식함(?)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제대로 알아듣기나 했을까마는 그래도 저 멜로디를 들을 때면 베토벤보다 나를 먼저 생각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