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떠나자!
로테르담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차표를 검사하던 차장에게 Eurail Pass를 내밀었더니 옆에 붙어있는 시트를 같이 달라고 보챕니다. 사용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달랑 종이 한 장에 불과한 Pass에 그런 것이 달려 있을 리 없죠. (유레일패스는 첫 여행지에서 개시 스탬프가 찍히면 그때부터 지정 기간 사용 가능한 표입니다) 그런데 이 아줌마 차장은 막무가내입니다. 검표 기를 들고 검표를 해야 한다고 우기는 걸 보면 사용 일정을 체크하는 플렉시 패스만 아는 것 같았습니다. 유레일과 플렉시 패스의 차이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는 정말 막막합니다. 끙끙거리며 근 15분 동안 제가 유럽에서 한 영어의 절반을 했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제법 차분하게 "This ticket is different Eurail flexy Pass! Eurail pass is one month free." 838$이라는 가격을 가리키며 "so I payed 838$. This ticket no problem. Flexy pass more chip. Maybe... Are you…." 그런데 착각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위의 문법이 맞는지 아닌지 지금도 모르겠고)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 티켓은 플렉시 패스와 달라. 유레일패스는 한 달간 마음대로 써도 돼. 그래서 내가 거금 838$나 지불했잖아. 이 티켓은 문제가 없어. 아마도 너 착각하는 거 아니니?" 이렇게 말하려 했는데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착각" 같은 고급언어가 생각날 리 없었죠.
Are you…. Are you…. 더듬거리다 느닷없이 crazy란 단어가 튀어나왔습니다. "Are you crazy?" 에고…. 차라리 "I am crazy"라고 할걸……. 이 아줌마는 그때부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동상처럼 서서 꼼짝을 않습니다. 정말 뒤집어지겠더라니까요. 무심결에 창밖을 보니 목적지 로테르담은 벌써 지나쳐 가고, 조금 더 가면 국경을 통과할 차례입니다.
그때, 차장의 손에 열차나 역과 통화할 수 있는 전화기가 들려있는 것이 보이더군요. "Just now, I passed Rotterdam. I'm very angry. your master phone call." 해석 가능하십니까? 어쨌든 제가 영어로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 이였습니다. 그다음은 우리말…. "이 여자 진짜 또라이 아냐? 너 신참이지? 니네 상관한테 유레일패스에 대해서 물어봐!" -그다음 퍼부은 말은 험해서 생략하겠습니다. 한참 열을 내자 슬그머니 차장이 사라졌습니다. 로테르담을 20분이나 지나쳐 이름 모를 역에 내린 웃비아. 돌아갈 열차를 기다리며 애꿎은 담배에 화풀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우터브루넨 오토 캠핑장
"아저씨 야영장에 한번 들러보세요. 어제 한국 사람들하고 거기서 묶었는데 오늘도 몇 분 남았습니다. 아저씨가 스위스 올 거라고 해서 사실은 혹시나 하고 기다렸더랬어요." 떠나기 전에 재기가 알려 준 오토캠핑장을 찾았습니다.
입구에서 서성이는데 한국인은 보이지 않고 남방 쪽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플리즈~ 웨어아 유 캄 프롬?" "아임 코리안" 헐~ 난 청년이 홍콩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일곱 명의 한국 동지들을 만났습니다. 저녁을 장만하러 쌀과 고기를 사 들고 오는 중이었죠. 재기가 어제 제 이야기를 했었던가 봅니다. 다들 반가워하더군요. 그냥 얻어먹기 미안해서 매점에서 포도주를 한 병 사 왔습니다.
밥을 짓고, 고기를 굽고, Egg 스크램블을 만든다고 달걀을 한판 사 왔는데 소금이 없습니다. 분명 옆에 있는 캠핑카 부부들은 소금이 있을 텐데 누구 하나 나서서 빌려올 생각을 안 합니다. 연장자인 제가 구슬리기 시작했습니다. "난 영어 실력이 짧아. 말발 좋은 너희가 가서 소금 좀 빌려와라." 조금 전까지 유럽을 씩씩히 돌았다며 자랑하던 대한의 건아들이 갑자기 숙맥이 되었습니다.
"에구~ 소금 하나 빌리는데 뭐가 그리 주눅이 드냐? 그럼 내가 가지." 불이 나게 뛰어가 소금 병을 들고 왔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아저씨 뭐라 그랬어요?" "뭐라 그러긴 에그 스크램블 만드는데 소금이 떨어졌다고 조금만 빌려 달라 그랬지." 막상 요리하려니 프라이팬에 두를 기름이 또 없습니다. "소금은 내가 빌려왔잖아. 이번에는 니들이 기름을 해결해!" 그래도 또 묵묵부답.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끌고 껑충껑충 뛰어가 버터를 얻어 왔죠.
박수를 치고 난립니다. "아저씨 이번엔 뭐라 그랬어요?" “이 화상들아 기름이 떨어져 스크램블을 못한다고 미안하지만 기름 한 번만 더 빌려줄 수 없느냐고 정중히 청했다. 왜?” 믿거나 말거나! 사실 뒤가 좀 걸쩍지근합니다. 그때 상황을 재현해 보겠습니다. -표정과 행동거지가 중요합니다- 아주 수줍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Please Lend me a salt…." 두 번째는 주머니 속에 있던 인삼 껌 두 개를 슬며시 내밀며 "I'm sorry…. butter, please…." 이 두 마디로 그 날 저녁 우리는 정말 포식을 하였습니다. 여행 한 달 만에 완벽하게 유럽 사람이 된 겁니다…. 하하
이곳의 젊은 분위기에 취해 인터라켄으로 돌아가는 일은 포기해 버렸습니다. 발머 하우스에 짐만 던져 놓고 온 것이 좀 그랬지만 그까이꺼 누가 집어가기야 하겠습니까? 야영장은 캠핑카에 부엌과 작은 거실, 침대 두 개가 붙어있는 4인용 구조였습니다. 난방은 가스로 했고요. 깨끗한 침구와 조리를 위한 집기는 완벽히 갖춰져 있었습니다. 차 한 대당 4명이 쓰면 유스호스텔 4인실 도미토리 값이나 별 차이 없었고요. 밤늦도록 차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폭포 소리, 바람 소리 듣는 기분도 꽤 괜찮았습니다.
배낭여행을 준비하신다면 첫 페이지부터 차분히 보아주시길 권합니다. 이 시리즈는 단행본 두 권 정도 분량으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정독하시면 여행 준비에 도움은 물론, 현지에서 시행착오도 훨씬 줄어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