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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hole Jun 17. 2023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무거운, 책임

내가 따를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가장 큰 항목

  오래되지 않은 예전에 직장상사를 4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글이 유행했었다. 일도 잘하고 성실한 리더 / 일은 잘하는데 게으른 리더 / 일은 못하는데 성실한 리더 / 일도 못하고 게으른 리더의 4가지 유형이다. 이 중에서 최고의 리더로 꼽힌 건 일 잘하고 게으른 리더다. 일이 생기면 척척 해내지만 굳이 성실하지 않아서 조직원으로 일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편하면서 성과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가 일 잘하고 성실한 리더였으며, 세 번째가 일도 못하고 게으른 리더였다. 최악의 리더로는 일은 못하는데 성실한 리더가 선정되었다. 일도 못하는데 성실하면 성과도 안 나는데 몸만 피곤하고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다르게 나누는 유형도 있다. 권위주의형 / 민주형 / 자유방임형으로 나누는 Lewin의 리더십 이론도 있고, 선도형 / 지시형 / 관계중시형 / 민주형 / 코치형 / 비전 제시형의 감성 리더십 이론도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리더십에 대한 유형이 있다. 그럼 이 중에서 내가 모시고 싶고, 또 나중에 내가 되고자 하는 리더는 무엇인가? 이걸로는 알 수 없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성실하고 게으르고를 떠나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가장 큰 리더의 항목이 빠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책임에 대한 태도이다.




  흔히 직장에서 R(Role) & R(Responsibilities)이란 얘기를 지겹도록 듣는다. 업무의 영역과 그에 대한 책임을 뜻하는 말이다. 역할과 책임을 미리 명확히 구분해야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해 나갈 사람(또는 부서)과 그에 따른 성과평가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이걸 따지느라 시작조차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사실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당연하다. 이 일이 내 일이 될지, 아니면 네 일이 될지가 여기서 결정된다. 기가 막히게 좋은 일이면 다 자기 일로 하고 싶고, 누가 봐도 암울한 일이면 다들 손사래 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과가 곧 자기의 성과, 즉 경제적인 결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Role과 Responsibility 중에서 더 중요한 건 무엇일까? 딱히 뭐가 더 중요하다고 꼽는 게 무의미하긴 하지만, 굳이 꼽자면 Responsibility 쪽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왜냐하면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직장이라는 조직의 구성원으로 책임을 진다라는 것은 꽤나 큰일이다. 직장에서 진행되는 일은 대체로 개인으로 는 감당할 수 없는 큰 일인 경우가 다반사인데, 그 일을 책임진다라고 하는 것은 만약 크게 잘못될 경우 앞으로 이어질 나의 직장생활 자체를 건다라는 의미이며, 지금까지 해당 필드에서 보낸 사회생활 전부를 건다라는 의미로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대한 보상은 적은 상태로 말이다.




  반면에 스스로 사업을 하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내 책임이다. 개인사업을 하고 있을 때 일이다. 갑자기 사업을 나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접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타인의 실수 덕분에 판매채널 대부분이 사라지고 앞으로도 회생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업자는 모든 최종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이 잘못될 수 있었는지 점검하는 일조차도 나의 책임이었다. 반면 직장인에게는 그렇지 않다. 해당 업무의 책임을 진 사람이 그 일이 잘 굴러가도록 해야 한다. 설사 잘 못 되어도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렇게 까지 크지 않다. 내 책임이 아니므로.


  다시 리더십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자. 앞서 얘기했듯이 직장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책임인데, 리더는 그 책임을 나보다 많이 부담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나보다 대체적으로 연봉이 높은 이유도 책임을 나보다 더 많이 지기 때문이다. 펀드 매니저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펀드 매니저는 일단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팀장급 매니저는 자산의 펀드뿐만 아니라 자기 팀의 전반적인 성과를 관리하고 감독할 책임을 진다. 운용 본부장은 해당 본부의 모든 펀드에 대한 성과와 프로세스에 대해 총괄 책임을 진다. 이렇게 보면 간단하고 명확하지만, 책임을 안 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균열이 발생한다.


  저렇게 책임소재가 명확한데 무슨 균열이 발생한다는 것인가? 명확해 보이지만,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주식을 운용하는 주식운용본부가 있다고 하자. 어떤 펀드를 담당하는 A 매니저는 반도체 회사 주식의 전망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관련 주식의 비중을 늘리자고 주장한다. 반도체를 담당하는 애널리스트 B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얘기한다. 본부장 C는 고민을 하다가 애널리스트인 B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고 본부 안에서 운용 중인 펀드의 반도체 관련 주식 비중을 늘리지 말라고 했다. A도 어쩔 수 없이 늘리지 않았다. 얼마 후 반도체 주식은 폭등했으며, A는 저조한 운용성과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 경우 누구의 책임일까? 비중을 낮추라고 지시한 C일까? 잘못된 의견을 낸 B일까? 실제 펀드의 포트폴리오를 담당한 A일까? 다들 각자의 R&R을 가지고 충실히 업무를 수행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그 책임은 모호하게 남았다. 다른 업종의 직장에서도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우가 수도 없이 발생할 거라 의심치 않는다.


  모시고 싶고, 또 내가 되고 싶은 러더의 모습은 이런 상황에 나타난다. 명확하지 않은 책임 소재를 자신에게 돌리는 리더. 그리고 그걸 모두에게 알려서 외부로부터의 화살을 막아주는 리더. 그런 리더가 계속 같이 하고 싶은 리더다. A의 행동은 자신의 지시를 따른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된 과정을 다른 연관부서에도 알려서, 고객과 연관부서로부터 날아올 A에 대한 화살을 막아주는 본부장이야 말로 조직원으로는 가장 큰 신뢰를 줄 수 있는 상사이다. 일을 잘하거나, 성실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권위적이거나 민주적인 것도 때와 정도에 따라선 호불호가 나뉠 수 있다. 일 못하고 성실한 최악의 리더라도 책임을 필요할 때 나서서 질 줄 알고, 조직원을 보호한다면 그 사람이 최고의 상사이다. 일 잘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상사라면, 나는 그 상사와 성과가 났을 때, 내가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 어필하느라 바쁘게 될 것이다. 반대로 무능하고 책임까지 회피한다면 기회가 날 때마다 왜 부서가 안 돌아가는지를 직장상사와 연관시켜 뒷담화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낼 것이다.


  R&R에 관하여 얘기할 때 언급한 바와 같이 책임을 나에게 돌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막상 일이 닥치면 내가 입을 피해에 대해 먼저 걱정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니, 왜 쟤는 일을 저렇게 해'라는 생각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나랑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 관계라면 더더욱이 굳이 나서서 책임을 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어진 역할이 책임을 지는 자리라면 나서야 할 때 나서는 리더를 만나는 것이, 나의 사적인 감정과 관계없이 직장생활을 해나감에 있어 가장 행운이 따르는 일이 아닐까 한다.




  처음 펀드 매니저 세계에 발을 들였을 꼬꼬마 시절, 매니저의 주문 지시를 수행하는 트레이더였던 나는 주문실수로 펀드의 계약 내용에 대한 위반사항을 발생시킨 적이 있다. 이 일이 나중에 감사를 과정에서 불거져 그 펀드의 매니저인 팀장이 경징계를 받게 되었다. 펀드 매니저에게 징계를 받는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일정기간 해당 매니저는 새로운 펀드를 운용할 수 없는 제약이 생기고 회사에서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생각보다 큰 사고를 쳤음을 깨닫고, 죄송함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던 내게 그분이 내게 툭 내뱉은 말은 이게 다였다.


니가 뭘 안다고 이걸 했겠냐. 그걸 봐주는 것도 내 일이지. 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내가 감당한다.


  그리고는 혼자 모든 일을 책임지고 징계를 받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그 순간에 들은 그 말은 10여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잊지 못할 말이 되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고 지금은 각자 다른 곳에서 회사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여전히 나는 아무런 도움을 못 드리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그분이 사람을 구하거나, 의견을 구하실 때 진심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해드리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러한 일이 생기면 정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분처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나 요즘처럼 책임을 지는 사람을 찾기 어려워진 시대에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의 희소성을 높이는 일이 될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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