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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hole Sep 16. 2023

너에게 왜 가르쳐줘야 하는데

하지만 가르쳐주고 싶다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같은 부서 후배 혹은 주니어로부터 이 얘길 들으면 일단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겉으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해 주면서, 빠르게 이 친구의 최근 주변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본다.


최근에 휴가나 반차를 쓴 적이 있었나? 사람 뽑는 곳은? 누가 이직했던가?

그러다 인적사항을 생각한다.

나이가 몇이더라? 직급은? 같은 나이대하고 비교하던 어떻지? 이 일을 한 지 얼마나 되지?

그러다 마침내 이 질문에 도달한다.

내가 뭘 얼마나 가르쳐줬지?




  회사라는 조직에 소속되면 원하든 원지 않든 어떤 부서에 배치받게 되고, 어떤 업무를 아서 하게 된다. 전임자 또는 사수로부터 해당 업무의 내용을 인수인계받아서 이어나가게 되고, 그 바탕으로 업무영역을 확장해 나가면서 커리어를 만들어 가게 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직장인의 얘기일터.

  

  다른 글에서 쓴 것처럼 여의도에서는 1년 내내 구인 구직이 진행된다. 당장 스카우트와 사퇴 선언을 하지 않더라도, 태핑 단계는 항상 열려있다. 그렇게 해서 옮겨간 동료는 다음 달에 나의 경쟁상대로 데뷔하게 되거나, 아니면 우리 하우스 포트폴리오의 전반적인 흐름을 새로운 회사에 알려주게 된다. 또는 주요 고객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경쟁 PT의 라이벌로 등장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왜냐하면 하는 일은 거의 다 비슷비슷한데 나를 스카우트한 이유가 바로 그거, 잘하고 있는 경쟁사의 노하우를 얻기 위함일 테니까.




  예전에는 예비 펀드매니저 신입 직원이 입사하게 되면 사수를 붙여주었다. 사수는 신입에게 시장이 돌아가는 법부터 해서 사소한 업무지식까지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이 업무는 왜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무엇을 봐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엑셀 작성방법과 기존에 만들어 둔 양식과 플랫폼, 심지어 거래처 담당자도 대물림(?) 되었다. 물론 이 당시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는 적용되는 지라 그렇게 하지 않은 분들도 있기는 했다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소위 '도제식'이라 불리는 이 방법이 운용사에서(특히 주식보다는 채권이나 대체투자 분야에서) 펀드매니저를 양성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이 당시도 여의도에 이직은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그 정도는 훨씬 덜했다. 명가라고 자부하는 곳들은 계열사와 함께 공채로 직원을 채용했고, 외부에서 뽑을 바엔 일단 내부에서 인력을 양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도제식 교육이 주로 이루어졌기에 어린 친구들의 이직은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가 힘들었고, 주식에서 스타 매니저 정도가 되어야 자주자주 이직을 하는 경우였다. 그런 와중에 판을 흔들어버리는 일이 터져 버린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쳐온 것이다.


  여의도에서 시장에 인력을 가장 많이 공급해 주던 창구는 매번 공채를 실시하는 중형 및 대형 증권사들이었다. 대체로 여의도 인력은 이들 증권사들에서 경력을 쌓다가 소규모 운용사나 증권사, 다른 투자기관들로 경력직 이직을 통해 공급되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생존이 우선됨에 따라 공개채용할 여유는 사라졌고, 이후 이런 대규모 신규인력 채용은 인력 수급 형태가 바뀌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기존 인력 감축과 신규인력 채용 제한은 자연스럽게 기존 구성원의 업무부담을 가중시켰다.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오자마자 즉시 투입이 가능한 사람, 즉 경력직 채용을 더 선호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여의도는 회사 간에 하는 업무가 매우 비슷하고, 금융업 특성상 인력이 핵심이며,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서 이직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새로운 공급이 없는 상황에서 저기에서 잘하고 있는 쟤를 데리고 와야 내가 좀 살 것 같은, 혼돈의 카오스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도제식 문화에도 변화가 일었다. 9까지 가르쳐 둔 상황에서 어느 날 갑자기 다른 회사로 가버리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다 가르쳐 준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갑자기 다크 사이드로 돌변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랄까. 물론 덕분에 타사의 노하우도 새로 합류하는 동료로부터 알아낼 수 있긴 했지만, 우리 회사의 노하우, 특히 나의 피와 땀과 노력이 들어가서 더욱 발전시켜 놓은 노하우가 넘어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싫은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1부터 9까지 가르쳐주던 상황에서(10은 나의 비장의 카드로 가지고 있긴 해야 하니까), 1부터 한 3~4 정도로만 알려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더군다나 애초에 크게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새로 오는 사람은 거의 경력직이었다. 전 직장과 현 직장 간의 규격 조정(?) 정도 수준의 통보만 이루어졌다.

  

  물론 신입에 가까운 경력직(?)이 들어오기도, 정말 신입이 가뭄에 콩 나듯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인력 공급원이 중대형 증권사가 주가 아니고, 작은 회사들 중에 연봉이나 복지가 좋지 않은 곳이 인력공급원이 되어 버렸다. 여력이 되는 곳은 연봉을 무기로 조금이라도 관련 경력이 있는 사람을 신입 대신 채용하고. 빼앗긴 곳은 자기네보다 더 힘든 곳에서 사람을 데리고 오는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데리고 온 인력에게는 예전 신입사원에게 알려주던 것처럼 업무를 알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교육 수준은 이제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정말 꼭 필요한, 업무가 이루어지기 위해 알아야 할 필수적인 것들만 알려주고, 실수했을 경우 사고가 터지는 일들에 대해서만 중점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거 겉핥기로나마 도입부를 구성하고 있던 큰 그림 속에서의 당위성, 맡은 업무가 이루어지는 이유 등은 필수적이지 않았고,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맡은 업무가 틀리지 않게 돌아가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다른 업무와의 연계가 약해졌다.


  매니저와 트레이더 간의 연계가 약해지면서 수급 동향을 파악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매니저는 쏟아야 하고, 왜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면서 트레이더는 매매에만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자금 담당자는 펀드 자금이 문제없이 돌아가는데 더욱 큰 비중을 두었고, 매니저는 수익률을 더 확보하기 위한 자금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주니어는 시니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왜 이렇게 하는지 묻지 않게 되었다. 시니어는 왜 이렇게 하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게 되었다.


  더 불편해지고, 효율성은 더 떨어짐에도 더 알려줘야 할 이유를, 더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잘 알려줘 봐야 내 밥그릇만 남에게 보여주는 꼴이 되고, 더 알려달라고 해봐야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뜬구름 잡는 것과 같은 얘기를 듣기 때문이다.




  누구의 잘못이 아닌 환경이 만들어 낸 변화다. 이 변화 속에서 누가 '그나마' 유리할까? 굳이 따지자면 뭐라도 하나 알고 있는 기득권이 그나마 유리해 보인다. 아직 그들은 보따리를 다 풀어놓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려보면 '이런 것까지 내가 해야 하나'라는 감정소모는 꼰대기피문화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업무 부담은 이미 사회생활 초반부터 지금까지 가지고 왔기에 별 느낌이 없다. 원래 더러운 물에서 잘 사는 물고기는 맑은 물의 느낌이 뭔지도 잘 모른다.


  특히, 경험치라는 부분은 금융시장에서는 생각보다 큰 값을 쳐준다. 최근과 같이 큰 변동성 속에서 위기인지 아닌지 모를 국면을 지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경험치를 통해서 뭐라도 하나 느껴본 자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시니어 매니저들, 대표 매니저들이다. 이들의 생명은 날이 갈수록 연장되고 있다. 시니어나 기득권이 잡고 있을 수 있는 포지션은 한정적이지만, 그 얼마 되지 않는 포지션이 후배들에게 오픈될 시기는 해마다 늦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것은 득이 되는 일이지 않을까? SNS에서 풀어내는 썰보다 더 값진 진짜배기 노하우들은 시장에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노하우는 각자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어떻게든 전달되어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얻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알려달라고 하면 된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자신이 만든 성취를 다른 이에게 알려줄 준비가 되어있다. 심지어 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 적어진 상황에서 이런 요청은 더 두근거리는 일일수도 있다. 루크 스카이워커가 외딴 별에 틀어박힌 뒤 환영이 되어 죽기 전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은 레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배워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직이 빈번한 시장에서는 자신이 보다 책임이 많아지는 위치로 갈 경우, 누구보다 자신의 노하우를 배워간 이를 먼저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한번 해보자. 닳은 일도 아니니.


이건 어떻게 이렇게 하는 걸까요? 알려주세요!


[표지그림 : Unsplash의 David Brooke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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