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이 틀린 펀드 매니저가 살아남는 방법
매월 초 펀드를 운용하는 모든 펀드 매니저는 운용보고서를 작성한다. 그 보고서 안에는 전월에 포트폴리오를 운용한 내역과 시장 동향, 수익률과 함께 금월을 포함한 앞으로의 금융시장 전망과 운용계획을 작성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다음 달 초가 되면, 금월에 운용한 내역과 수익률을 작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전망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고백하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매월마다 작성했으니 이제는 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성적표를 받아 들고 이를 고백하는 일은 항상 긴장하게 된다. 항상 금융시장의 방향을 맞추기도 어려울뿐더러, 펀드 매니저가 전망하고 있는 시장의 주기와 보고서 작성 주기가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다행히도 전망했던 것과 같이 시장이 흘러가면 글은 청산유수와 같이 써진다. 어떻게 하면 겸손하게 자랑할 수 있을까를 깊게 고민하며 다음 시장전망까지 자신감 있게 작성한다. 반면에 전망과 시장이 다르게 흘러갔다면 이제 자아비판의 시간이 도래한다. 작성하기 전부터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이걸 어떻게 다 맞추나'부터 시작해서 운용 과정 속에 있었던 뭔가 억울했던 일들도 떠오른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할까. 결과는 '틀렸다'라는 점이고 매니저는 돈을 받고 그 펀드를 잘 운용하기로 한 사람이다. 프로는 변명이 필요 없다.
신이 아닌 이상에야 매번 맞출 수 없다.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도 다음 달 주가는 이렇게 된다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현시점에서 인류 과학의 최종 산출물인 AI도 내일 주가는 답하지 못한다. 하물며 일개 펀드 매니저가 매번 시장을 정확하게 전망하고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료 매니저와 나누는 농담 중에 이런 얘기를 한다. 그렇게 자신 있게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사표 쓰고 내 돈을 투자하지, 왜 회사에서 일을 하냐고. (참고로, 펀드 매니저는 주식 투자에 법률상 많은 제한이 따른다. 거의 하지 말라는 수준이다.) 그럼 한 치 앞도 모르는 펀드 매니저에게 돈을 왜 맡겨야 할까? 말이 매니저지 알지도 못하면서 미래를 얘기하고 투자를 받는다면, 이거야 말로 사기꾼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업계에서 꾸준히 좋은 성과를 내는 분들을 보면 기가 막히게 시장을 예측하는 분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 고견을 구하고자 얘기를 나누어 보면 이 분들도 시장을 잘 못 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다. 분명 전망이 틀렸는데, 수익률은 그거치곤 나쁘진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시장이 돌아서면 수익률이 전에 부진했던 것을 만회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래서 결국 길게 보면 업계의 상위권에 슬그머니 들어가 있다. 시장은 비슷하게 보았는데 결과는 다르다. 사실은 다른 방향으로 운용을 하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아닌 척한 것인지 의심이 들면서 배신감도 들기도 하고, 어떻게 저렇게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호기심과 경외감도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원인과 방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제일 밑에 깔려있는 것은 나를 과신하지 않는 것이다. 한번 내가 씌운 프레임은 나 스스로 바꾸기 너무너무 어렵다. 누가 와장창 부숴야만 간신히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남이 그렇게 해주기도 어렵다. 만약 감 놔라, 대추 놔라 했는데 틀리면 그 책임을 누가 감당할까.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든 프레임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결과적으로 포트폴리오에 여유를 주게 된다. 나를 과신하지 않기에 내가 전망하는 방향으로 포지션을 소위 몰빵 하지 않는다. 그럼 남는 포지션은 무엇을 할까? 때로는 현금이 답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다른 포지션을 구축하게 된다. 시장의 방향성과는 상관성이 좀 떨어지는 포지션이 주로 그 대상이 된다. 주식시장에서는 '스마트 베타', 채권시장이나 기타 시장에서는 '상대가치'라 불리는 종류의 것들이 그러하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시장 전망과는 관계없는 그런 성격의 포지션을 구성한다. 앞서 얘기한 상위권의 높으신 분들은 이런 포지션을 다양하게, 많이 만들었다. 수익은 상대적으로 적지만, 보다 확실한 안정성을 가진 포지션의 개수와 비중이 많았다.
여기까지는 소위 잘 나가는 매니저들의 포트폴리오를 스톡(Stock)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의 이야기다. 방향성을 가지고 큰 거를 노리기보다 안정적이고 확실하게 작은 수익을 챙길 수 있는 포지션을 다수 구성했고, 방향성 베팅은 여유를 가지고 구성했다. 이런 성격의 포트폴리오는 운용의 다이내믹스, 플로우(Flow) 측면에서도 유리하게 만들어 준다. 바로 '대응'이 원활하게 무리 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 준다.
'고집과 곤조 사이'에서 펀드 매니저가 자신의 전망대로 흘러가지 않는 시장에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얘기했다. 사람의 뇌란 간사하기 이를 데 없기에 분명 나는 이런 이유로 이렇게 본다고 했지만, 맞지 않으면 어느샌가 슬그머니 다른 이유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내가 맞았음을 숫자로 증명하기 위해 포지션을 유지하고 버티게 된다. 하지만 크게 베팅하지 않았으면, 상대적으로 쉽게 포기할 수 있다. 굳이 이것으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기에 새로 생각을 고쳐먹기에도 편하다. 하지만 대응이 중요한 이유는 시장이 다시 한번 더 변할 때 추가 수익을 낼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은 결코 한 방향으로 흐르지도 않고, 한 번에 가지도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남들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공수전환을 빠르게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포지션의 여유는 그 과정에서 대응할 수 있게 만들어 주고 포트폴리오에 역동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수익률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재테크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종목에 꽂히면 거기에 한 번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사실 개미투자자가 기관투자자보다 수익률이 높을 수 있는 이유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기 때문이고, 어떤 시점에선 그것이 가장 최고의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독립시행을 계속해서 반복할 경우 승률은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말 혼자 개인투자를 계속하는 것이 맞다.
선택한 종목의 승률이 계속 잘 나올 것이라 믿는 시점부터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자. 내가 고른 이 투자가 항상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애초에 이상한 법이다. 건강하게 길게 투자하는 방법을 따라가야 한다. 투자에서만큼은 나에 대한 믿음을 조금은 내려놔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