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묵은 '나'의 기억을 닦아, 글로 세상과 연결하는 중년을 위하여
오십의 공허, 읽고 쓰는 수다로 채우다
어느 날, 스마트폰 화면 위로 낯선 이의 질문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았다. SNS에서 인연을 맺은 이가 던진 질문이다.
“50대를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중년이라면 누구나 움켜쥔 묵직한 질문이다. 직장이라는 치열한 전장에서, 가정이라는 둥지를 짓고 지키느라 나를 지운 채 숨 가쁘게 달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에는 희끗한 서리가 내려앉았고, 인생의 시계는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때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다. 바로 ‘덩그러니 남겨진 나’라는 낯선 감각이다.
아이들은 제 갈 길을 찾아 떠나고, 직장에서의 존재감은 예전 같지 않다. 사실 위태롭다. 시간은 넘치는데 마음은 텅 빈 폐가처럼 스산하다. 누구나 겪는 이 서늘한 공허함 앞에서 우리는 자문한다. “내 남은 인생, 정말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진지한 답변을 적어 내려갔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찾아낸 생존의 기록이었다. 핵심은 명료하다. 삶의 무게 중심을 타인에게서 ‘나’에게로 옮기는 것. 50년 동안 내 안에 쌓인 경험을 발굴하는 것이다. 잡동사니가 되어 엉켜 있을 기억을 꺼내는 일, 먼지 덮인 기억을 닦아 광을 내는 일, 나는 그것을 ‘셀프 유물 발굴’이라 부른다.
이 발굴 작업에 가장 유용한 도구는 단연 ‘책’이다. 하지만 책을 고르는 일부터가 난관이다. 평생 업무 서류만 들여다보던 눈으로 서점에 서면 현기증부터 난다. 주부라면 업무 서류마저도 없다. 아이들 학교 안내문과 학원 광고지가 전부였을까. 긴 글과 이별한 지 오래다. 제목을 보고 고르자니 불안하고, 목차를 훑자니 더 헷갈린다. 나는 나만의 독서 원칙을 세웠다. 일종의 ‘10페이지 법칙’이다. 보통은 제목을 보고 목차를 훑어보지만, 나는 반대로 한다. 제목은 후킹이 강하고, 뼈대만 앙상한 목차를 보면 독서욕이 달아난다. 일단 제목이 마음에 들면 무작정 책을 펼쳐 본문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딱 10페이지만 읽는다.
승부는 거기서 결정된다. 10페이지를 넘기는데 술술 읽히고, 문장이 내 마음을 톡 건드린다면 그 책은 ‘합격’이다. 목차는 그때 확인한다. 이미 마음을 뺏긴 뒤에 보는 목차는 지루한 요약본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여행지의 지도가 된다. “이 작가가 나를 이런 세계로 이끌겠구나” 하는 설렘이 증폭된다. 반대로 10페이지가 고역이라면? 미련 없이 덮는다. 그건 지금의 나와 주파수가 맞지 않는 책이다.
책이 기억의 문을 두드려 “맞아, 나도 그랬지” 하는 순간이 왔다면, 이제 진짜 중요한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쓰기’다. 읽은 것을 내 언어로 뱉어내는 과정이다. 묵혀있던 내 기억을 글로 포장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발행’까지 권한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 앞에서 주춤거린다. 맞춤법이 틀릴까 봐, 문장이 매끄럽지 못할까 봐 스스로 검열부터 한다. 학창 시절 받아본 빨간 펜의 공포가 여전한 탓이다. 착각이다. 우리가 쓰려는 글은 점수를 받기 위한 논술 답안지가 아니다. 친구와 막걸리 한 잔 걸치며 나누는, 침 튀기는 수다의 기록판이다.
글을 발행한다는 건, 닫힌 방 문을 열고 광장으로 나가는 일이다. “내가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문득 옛날 생각이 나더라”라며 말을 건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나의 진솔한 수다를 발행하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귀를 기울인다. “저도 그래요”, “제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아요”라며 응답이 온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 터놓을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고들 한다. 새로 사귀는 것도 귀찮다. 이해관계없이 속내를 보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글을 매개로 만나면 다르다. 내 생각의 결, 내 삶의 냄새를 맡고 다가온 이들이 있다. 글쓰기는 50대에 친구를 얻는 가장 우아한 지름길이다.
공허함이 문을 두드릴 때, 두려워 말고 서점으로 가라. 10페이지를 읽고, 자신의 유물을 발견해라. 그리고 떠오르는 단상을 적어라. 과감하게 세상에 내보내라. 사소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자신에게는 평생의 벗을 선물할 것이다. 읽고, 쓰고, 발행하는 삶. 이것이 내가 찾은 50대 이후의 가장 확실한 행복론이다.
다시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