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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코 May 06. 2024

쌉싸름¹: 홍삼맛 사탕

름의 나열 ch.9


친구와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서려는데, 계산대에 있는 작은 바구니가 보였다. 손님들이 하나씩 집어갈 수 있게 사탕들을 담은 바구니였는데, 여러 가지 맛의 종합캔디들을 담아둔 듯했다. 내 손가락이 분주하게 과일맛 사탕이랑 박하사탕들을 골라낸 후 집어든 것은, 빨간색 포장지가 촌스러운 홍삼맛 사탕이었다.


"할머니냐? 홍삼맛 사탕이라니."

"생각보다 괜찮은데."


친구는 과일맛 사탕을 하나 고르면서 내 손에 들려진 홍삼맛 사탕을 보더니,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장난스럽게 윽— 하고 구토를 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아랑곳 않고 홍삼맛 사탕을 입에 넣었다. 설탕의 달콤한 맛이 강하게 나면서도, 뒤이어 홍삼의 쓴맛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홍삼맛 사탕을 먹다 보면 참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단맛보다 쓴맛에 더 집중하게 된다. 조금 더 쓴맛을 느끼기 위해, 입안의 사탕을 열심히 굴려 촘촘한 단맛을 헤집었다. 그러다가 문득 쓴맛에 익숙해지면, 다시 단맛을 느끼기 위해서 감각들을 재정렬한다. 나는 이 기묘하고 변덕스러운 현상이 이상하게 끌렸다.




나는 약을 곧잘 먹는 아이였다. 중의적인 문장인데, 두 가지 의미가 다 맞다. 약을 자주 먹기도 했고, 잘 삼켜내기도 했다. 약하게 태어난 탓에 잔병치레가 유독 많아서 병원을 자주 다녔는데, 아이가 삼키기 어려운 알약 대신 늘 하얀색의 가루약이 처방되곤 했다. 엄마는 커다란 밥숟가락 위에 가루약을 놓고 물을 조금 풀어 약지로 살살 개어냈다. 제법 씁쓸한 맛의 묽은 물약이 완성되면 나는 아기새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잘도 받아먹었다. 처음에는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쓴맛이 혓바닥 구석구석 감돌았다. 나는 열심히 쓴맛 속에 미미하게 숨어있는 다른 맛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자세히 맛보면 새큼한 맛이... 또 자세히 느끼다 보면 달큼한 맛도... 입맛을 열심히 다시다 보면 쓴맛들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한 번도 뱉어내거나 토하지 않고 되려 아쉬운 듯 연신 쩝쩝대는 나를, 엄마는 기가 찬 웃음으로 바라보곤 했다.


어려서 몰랐다. 삶에는 물에 갠 가루약을 먹는 일보다 더 쓴맛의 일들이 가득하다는 걸. 하루는 정말 고된 하루를 겪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바닥이 핑 돌고 정수리 부분이 열기로 뜨거웠다. 뭣보다 종일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속에서 역할 정도의 쓴맛이 올라왔다. 문득 물에 갠 가루약을 입에 털어 넣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은 정말 강렬하게 쓴맛의 날. 나는 씻지도 않고 바닥에 늘어지듯 누워서 하루를 다시 음미했다.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의외로 달큼한 순간들이 있고, 또 모르고 지나쳐 버렸지만 상큼한 맛도 느껴진다. 하루 속 여럿의 찰나들이 본래 어떤 맛이었는지 천천히 살펴보다 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쓴맛들이 점차 녹아가는 얼음처럼 작아진다.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쓴맛의 시간들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다채로운 맛의 집합체였단 사실을 깨닫는다.


또 어떤 하루는 두 볼이 상기될 정도로 행복한 기분이 가득하다. 이런 날은 어떤 맛이라고 하나... 그러니까 잘 만들어진 초콜릿의 묵직한 단맛이다. 초콜릿 한 조각이 입 속에서 열기에 녹아내릴 때, 황홀할 정도의 단맛과 뒤따르는 기쁨. 하지만 단맛들의 사이로 작은 고개를 빼꼼히 내미는 쌉싸름한 맛을 발견하는 순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쌉싸름한 맛은 한껏 취해있는 내게, 마냥 방심하지 말라는 얄궂은 말을 건넸다. 놓칠 수 없는 긴장감의 맛이다.




홍삼맛 사탕의 달콤한 맛과 쌉싸름한 맛이 뒤엉키듯 풀어지면, 나는 감각의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선다. 수많은 맛의 순간들 사이에서 내가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나. 중심을 잘 잡아내는 일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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