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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Nov 30. 2020

언니 1

-1-

언니 내가 잘 모르겠는 게 있는데 대신 좀 물어봐 주세요. 정말 갑갑해서 그래요. 우선, 그래요. 기억하시나요 우리 처음 만난 날. 그날 언니가 입은 남청 빛 수트가 아직도 선명해요. 텍스쳐가 어찌나 고운지 손으로 한번 쓸어보고 싶은 충동에 팔을 들었다 놨다 했더니, 언니가 그걸 보고는 살포시 웃었죠. 언니는 따로 립스틱을 바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입술이 매끈하니 보는 내 마음이 멍해져서 침을 꿀꺽 삼키길 여러 번이었어요. 그러고 우리가 뭘 했던가요. 남포동에 오래된 골목을 걷다가 국제영화제 거리로 가자고 해서 글로 따라갔죠. 주말 밤, 연인들, 친구들 모두 길거리를 거닐며 시끄럽게 떠들었어요. 그들 사이로는 불법개조한 오토바이가 날카로운 경적 소리를 내며 지나갔고요. 저는 무심코 귀를 막았는데 언니가 잠깐 저를 바라봤죠. 검은 동공이 잠깐 빛나듯이 반짝였죠. 나는 세계에 이 사람 눈알보다 큰 블랙홀은 없다 생각했어요. 침이 스스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해서 나는 목젖을 기계적으로 움직여야 했어요. 그날 밤 아무 노트나 찢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나갔어요. ‘언니가 나를 바라본 건 내가 들어서다. 내가 소음을 듣고, 눈가를 찡그리고, 콧등을 찌푸리며 귀를 막으니, 그래서 언니가 나를 바라봤다. ‘ 내가 뭔갈 들어서, 그래서 언니가 나를 봤잖아요. 저는 그게 우리가 연결되었다는 증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김 교수님은 아니라고 했어요. 어느덧 한낮에는 땀이 살짝 맺히는 계절로 바뀌고 그달의 첫 월요일이었을 거에요. 나는 ‘언어문화의 이해’를 들으러 가는 중이었고, 언니는 교수동 앞에서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었어요. 티없이 깨끗한 흰색 벤츠는 교수님보다 언니한테 아주 잘 어울리니까, 차는 당연히 언니의 차일 거에요. 언니는 그 날 조금 밝은 노란색의 롱 원피스를 입고 있었죠. 아, 언니가 입은 옷을 기억하는 건 언니와의 모든 대면을 그려 놓았기 때문에 그래요. 항상 들고 다니는 스프링 노트에 두서없이 배열된 메모와 함께 그림을 그렸어요. 날짜도 대충 적고. 날씨도 대충. 모든 건 대충이지만, 시야에 들어온 언니는 놓치지 않았어요. 어쨌든 ‘언어문화의 이해’ 강의 날로 다시 돌아가 볼게요.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언니는 운전석에 앉아 서류가방을 열었어요. 거기서 아이패드를 꺼내더니 몇 분 동안 그림을 그렸어요. 언니는 내게 눈에 띄는 재능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그림은 언니가 더 소질이 있었어요. 이전에도 많은 그림을 그렸잖아요. 보여준 그림들은 전공자가 보기에도 훌륭했어요. 오랫동안 같은 자세를 취하고 집중하는 모습은, 그래요, 화가의 자세죠. 그렇게 화가가 되는 거에요. 나는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속으로 삼켰어요. 순간적으로 내려다본 스마트워치에 9시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지만 늦었어도 상관없는 거에요. 이 순간을 기억하자고. 저녁에 꼭 그려 놓자고. 그렇게 머릿속으로 드로잉하며 본관으로 달려갔죠. 김 교수님은 마침 본관 오른쪽의 플라타너스 나무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요. 교수님, 수업 안 가세요? 교수님은 희미하게 웃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흔들어 보였어요. 곧 내 폰에 진동이 울렸고 [교수의 개인 사정으로 휴강합니다. 과제는 온라인으로 제출..]라는 알람 메시지가 도착했어요. 교수님.. 교수님, 무슨 일 있으세요? 




교수님은 언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급히 가봐야 한다고 하면서도 담배를 끊지 않았어요. 윤이, 만났죠? 교수님은 갑자기 언니 얘기를 꺼냈어요. 우리가 만나서 인사를 나눴어야 했는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어요. 못 봤구나. 교수동에서 여기로 오고 있을 거에요. 지금은 경황이 없으니까, 나중에 한 번 연락해봐요. 교수님은 경황이 없을 언니를 나무 밑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교수님의 느릿한 끝말이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발을 잡아끌었어요. 윤이는 당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대답해야 하나 싶었지만 교수님과 나와의 거리는 무척 애매해서 못 들은 척 지나치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 교수님의 얼굴이나 표정을 알 수 없어요. 나는 나름 대차게 걸어가서 별관에 도착했고, 큰 숨을 내쉬며 자판기에서 게토레이를 뽑았어요. 나는 물이 맺힐 정도로 차가운 게토레이를 양손과 목 뒤편까지 쉬지않고 문질렀어요. 그리고. 그 길로 곧장 사람 없는 계단으로 가서 언니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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