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아동혐오(Kids-phobia)’
시대에 살고 있다.
어린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더 이상 단순한 양육이 아니다.
이제 육아는 사회적 시선과 끊임없는 눈치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심스러운 존재됨’의 연속이다.
첫째 아이를 낳고 백일이 지난 어느 날,
아이와 단둘이 나들이 겸 버스를 탔다.
백일 전에는 괜스레 조심스러워 집에만 머물렀지만,
백일이 지나자 마음속에서 용기가 샘솟았다.
둘만의 첫 외출이었다.
이곳저곳을 함께 돌아보다 돌아오는 길,
짧은 거리였지만 지친 몸에 버스를 탔다.
아이는 잠든 상태였다.
버스가 흔들렸는지, 아이가 살짝 깨 칭얼거리다 이내 다시 잠들었다.
‘안 깨서 다행이다’ 안도하던 찰나,
앞 좌석에 앉은 젊은 여성의 휴대폰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 “뒤에 애새끼가 앉았는데 너무 시끄럽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움츠러들었다.
‘맘충’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숨을 골랐다.
그리고 괜스레 서러웠다.
버스를 말고 차를 탈걸.
왜 오늘따라 하필 버스를 탔을까.
그날 이후,
아이가 울면 나는 밖으로 데리고 나가 달랬다.
식당에서는 조용히 하지 않으면 음식을 포기한 채 뛰어나왔다.
자연스럽게 키즈카페나 놀이터처럼
‘아이의 존재가 허용된 공간’만 찾게 되었다.
육아는 눈치의 연속이 되었고,
공공장소에서 나는 늘 좌불안석이었다.
물론 가끔은 식당 이모님들이
“엄마 힘들지, 그래도 잘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주셨다.
아이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간에서
아이의 작은 울음소리조차 시선을 끌었다.
‘애 데리고 왜 여길 왔냐’는 무언의 압박은 여전했다.
이런 현상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아이들이 불편한 존재는 아니었을 테니까.
어쩌면 ‘마음 읽어주기’ 육아가 유행처럼 번지고,
그 방식이 경계 없는 양육으로 오용되면서
공공장소에서 아이의 행동이 제어되지 않는 상황이 많아진 건 아닐까.
아이들이 떼쓰는 모습을 보면
그 안에 이런 목소리가 숨어 있다.
> “전엔 다 해줬으면서 왜 지금은 안 돼?”
사람 많은 곳에서 떼를 쓰면,
부모는 감정을 읽어주며 진정시키려 하고,
그 순간 아이는 배운다.
“떼쓰면 다 된다.”
육아의 왜곡된 흐름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명확한 경계와 일관된 반응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과
그 감정에 휩쓸리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 채
타협을 반복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초보 부모 시절,
그 흐름에 휩쓸렸다.
“네 마음이 그랬구나”라는 말을 수없이 연습하며
감정을 읽어주기만 하면 좋은 부모가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육아의 본질은 감정이 아니라 일관성임을 깨달았다.
감정을 존중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멈춰야 할 선’을 지켜주는 어른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선은 아이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그 안정감은 결국
사회 속에서 자신을 조절하는 능력으로 자라난다.
무분별한 감정 수용은
때때로 아이를 사회적으로 더욱 고립시킨다.
나 역시 아이와 마주할 때면,
그 사랑스러움이 어느 순간 공중분해된다.
180도, 아니 360도 다른 모습으로 나를 향해 울고, 떼쓰고, 부딪혀올 때면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이 통하지 않는 벽을 마주한 듯 막막해진다.
아이의 감정은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 혼자만 이 싸움을 버티고 있는 것 같은 고립감을 느낀다.
> “한 사람의 인생을 빚어낸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그리고
천만 배의 인내심을 되새긴다.
육아는 결코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부모가 완벽해서 아이가 잘 자라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흔들릴 때 지지해 주는 사회가 있을 때,
아이는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육아는 더 이상 가정만의 책임이 아니다.
공공의 과제다.
왜냐하면,
오늘의 아이는 내일의 사회를 살아갈 주체이기 때문이다.
육아를 부모의 몫으로만 치부하는 사회는
결국 아이를 고립시키고,
그 고립은 자라서 또 다른 무관심으로 순환된다.
아이를 낳은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다.
아이가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지금, 절실하게 필요하다.
사회의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아이들은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며,
부모는 ‘맘충’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숨죽이지 않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 우리는 왜 아이의 존재 자체를 불편해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