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한 시대의 육아

우리는 왜 서로에게 예민해졌을까

by 이서연

내 글을 본 지인이 말했다.

“그건 좀 너무 편협한 시선 아니야?

요즘 엄마들이 더 예민하지.”

아이를 키운 지 오래된 그는, "30년 전엔 그런 일 없었어"라고 덧붙였다.


오히려 요즘은 아이가 귀엽다고 말만 해도 혹시나 오해받을까 봐 조심하게 된다고 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었다. 내가 꺼낸 경험 하나가, 누군가에겐 불편한 인식이자 반론의 계기가 된 것이다.


나는 단지 '아이와 함께 있는 내 자리'가 작아지는 순간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겐 '요즘 부모의 과잉 민감함'으로 읽혔다. 그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또 다른 지인은 조용히 말했다.

“요즘 아이 혐오가 심해진 건 맞아.”

그는 이어서

"아이들이야 시끄럽게 떠들 수 있어 그렇지만,

제재 안 하는 부모를 보면 답답하긴 해”라고 덧붙였다. 아이의 행동보다 부모의 태도가 불편함의 진원지라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모두가 불편함을 말하고 있었지만, 기준은 달랐다. 누군가는 아이가 문제였고, 누군가는 부모가 문제였고, 누군가는 그걸 불편해하는 자기감정이 문제라고 했다.


우리는 지금, 모두가 예민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예민함은 서로를 향해 조준되고 있다.


한 지인은 말했다.

“요즘은 아이뿐 아니라 강아지를 만져도 눈치가 보여. 사람들 모두 경계가 분명해졌어.”

예전엔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아이를 혼내던 어른이 있었지만, 지금은 작은 친절도 ‘침해’로 해석될까 조심한다. 접촉이 조심히 되고, 조심히 무관심이 된다. 그런 감정의 거리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피곤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아닐까.


사람들은 이제 타인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는 걸 꺼린다. 단지 아이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책임을 지기 싫고, 누군가의 판단 대상이 되기 싫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귀하지만, 남의 아이는 귀하지 않다’는 이중 감정은, 그런 사회적 압박 속에서 자라난다.


게다가, 요즘은 작은 불편함조차 기록되는 시대다. 어떤 가게에서 기분이 나쁘면,

사장과 대화하기보다 블로그에 먼저 적는다. "불편함을 느꼈으니 책임이 있다"는 식이다.

글을 쓴 사람은 말한다.

“악의는 없어요.”

하지만 그 글이 퍼지는 순간,

가게는 불편함의 낙인이 찍힌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불편함으로 인해, 아이와 부모는 공간에서 ‘조용히 배제되는 존재’가 되곤 한다.


나는 내 글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길 바란다.

내 글이 누군가를 겨누는 프레임이 되지 않기를.

누군가에게는 예민한 반응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조심스러움을 기록하고 싶었다.


이해받으려는 시도와, 오해받을 수 있다는 전제를 동시에 품는 글쓰기를, 나는 계속해보고 싶다.

내가 불편했던 만큼, 누군가도 나를 불편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균형 안에서 말하고, 기록하고, 다시 돌아보는 일. 지금 우리가 정말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서로를 판단 없이 바라보려는 시도 아닐까.


그 시도 안에서 아이들과 어른과 사회가 공존하고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지금도,
이 낯선 공존을 배우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록해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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