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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Mar 12. 2023

꿈이었던 공무원, 벗어나고픈 현실이 되다.

지금 내 꿈은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

난 꿈이 없었다.


아니다. 꿈이 있었겠지만 어느 순간 없어졌다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평탄하고 모범적이었던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나는 수능을 망쳐서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적당히 점수에 맞게 지원하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중에 적당히 이름 있는 대학의 전공 중에서 학과를 골라 지원했던 것 같다. 지독히도 갈등 회피형 인간이었던 나는 논술시험을 보고 싶지 않았고, 특차로 지원을 하다 보니 선택의 폭이 더 좁아졌지만 그때 당시에는 어쨌든 더 이상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안정권의 대학과 전공으로 지원했고, 합격을 했다.


그렇게 지원한 전공 공부가 재밌을 리 만무했다. 재미도 없고, 공부하고 싶은 의지도 없었다. 


어릴 때는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고등학교 때 학교가 지긋지긋해지고, 선생님들이 존경보다는 증오의 대상이 되면서(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공부를 많이 시키는 학교였고, 어쩌다가 야자땡땡이치고 걸리면 다음날 매타작이 기다리고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꿈도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기에 나는 고등학교 때 꿈을 잃고 방황했는데, 그 여파는 대학교까지 이어졌다.


대강 들어온 대학은 나에게 학문적으로는 1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놀고먹는 대학생의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3학년 때 1년간 휴학도 했지만 하고 싶은 게 없고 아무런 계획도 없는 이에게 휴학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남들은 취업 준비로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하고, 토익이다 토플이다 시험 보느라 바빴는데 나는 토익이 뭘까 궁금해서 2번 정도 쳐본 게 다였다. 심지어 공부도 하지 않고 시험을 봤으니 반타작을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취업에 대한 고민이 없었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다.)


졸업을 앞두었을 무렵 알고 지내던 학원 원장님이 나에게 잠시만 학원에서 일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학원 선생님이 갑작스럽게 그만두게 되어서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 않다고 따로 취업예정된 게 없으면 한두 달만 일해달라고 하셨다. 졸업 후 아무런 계획이 없던 내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 졸업 전에 보습학원에서 초등학생, 중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원 강사가 나에게는 잘 맞았던 건지 처음 몇 개월은 재미도 있었고 폐강 직전의 초등학생 영어교실은 운이 좋았는지 8명에서 40명이 넘을 만큼 학생 수가 늘었다. 처음에 원생이 늘어나면 늘어나는 만큼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했던 원장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학원 강사의 출퇴근 시간은 일반 직장인과는 달라서 퇴근 후 친구를 만날 수도 없고, 원래 생각했던 직장이 아니었던 터라 금세 학원 강사라는 직업에 싫증이 났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다시 학교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나에게 맞을 거 같았다. 다시 교대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늦게 반수를 준비했다.(대학 졸업 후였으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집에서 혼자 문제집 사서 공부한다고 고등학교 졸업한 지 5년 만에 다시 하는 수능 공부가 될 리 없었다.


그렇게 25살에 다시 본 수능시험은 완전 망했다. 나는 방황했다. 나름 순탄하게 굴러왔던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았다. 막막했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뭐라도 길이 있었으면 갔을 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창업의 시대가 아니라 취업의 시대였고, 직업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다. 나 같은 모범생은 내가 스스로 내 앞날을 개척할 수 없었고 정해진 길에 편입되어야 했다. 그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인 줄로만 알았다.


어떻게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던 26살. 엄마가 나에게 공무원 시험을 봐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인생 낙오자처럼, 히키코모리처럼 집에 처박혀 있던 나는 그렇게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다. 이미 인생의 무기력한 나락으로 떨어져 가던 나는 공부도 예전 같지 않았다. 계속 계속 떨어졌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면 합격할 수는 있는 것일까. 합격이라는 게 유니콘처럼 현실세계에선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에는 일반행정직 시험을 보다가 학교 후배가 1년 만에 교육행정직에 붙은 걸 보고 교육학개론 공부를 병행해서 수험 기간 총 2년 2개월이 걸려 커트라인으로 교육행정직 공무원이 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하다. 1차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자마자 엉엉 울면서 거실로 나가 엄마를 끌어안고 오열했던 기억.

영문도 모르던 엄마가 무슨 일이냐고. 괜찮냐고 물어보면서 같이 울었던 기억. 몇 주간 긴장하면서 노량진에 나가 면접 스터디를 하고. 면접을 보고 최종 발표를 기다릴 때까지 세상의 모든 신들을 소환하며 합격만 시켜주신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던 기억들...



그때 나의 꿈은 공무원이 되는 거였다.

공무원만 시켜주면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할 것이며, 어떤 오지를 보내도 군말 없이 가서 일하겠노라고 하늘에 대고 빌었던 시절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이기 때문에 딱히 어떤 업무가 아니라 뭐든 하는 것인데 나는 무엇을 꿈꾸었던 것이었을까. 국민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간절하게 바랐던 것인지 공무원이라는 네임밸류를 얻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지 이제는 너무도 명확히 알겠다.


내가 하는 일이 한때는 즐겁고 좋았지만 모든 일을 즐겁게 할 수는 없었고, 남들이 하기 싫어서 떠넘긴 일은 나도 하기 싫었으며, 2년마다 돌아오는 인사철마다 좋은 자리, 집과 가까운 학교로 가기 위해 절박할 정도로 여기저기 손을 썼다.(손쓴 대로 되지 않아 항상 원하는 곳에 발령 나는 운은 누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일이 너무 하기 싫고, 보람도 없으며, 10년 후에도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진저리가 처진다.


올해까지만 다니고 그만두겠다고 결정을 하고, 남편과도 얘기를 마쳤고, 이제 10월쯤 학교와 교육청에 이야기하고 마무리를 하면 되겠지.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게 너무 끔찍하다. 이번 주는 개학이 있어서 더 마음이 갑갑하다.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져서 남은 시간 대충대충 때우기 편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하루하루 시간이 더 안 가고 진심을 다해 일을 할 수 없어서인지 더 어렵고 힘들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눈 뜨면 퇴직 다음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일요일 밤이다.


퇴직의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2022.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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