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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Mar 13. 2023

인사담당자에게 의원면직하겠다고 말해버렸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굳이 그만두기 위해 12월 31일까지 기다리는 짓은 안 하겠다고, 바로 신청해서 최대한 빨리 해버리겠다고 결정하고 나니 정신이 또랑또랑해져서 내내 뒤척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급한 일을 처리하고 9시 반쯤 지역교육청 인사담당자가 메신저에 접속했는지 확인했다.


있다.


메신저 메시지보내기 새창을 열고...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주무관님, 안녕하세요.
의원면직하려고 하는데
절차와 제출서류 알려주시면 감사합니다.


보내기 버튼 위에 마우스 포인터를 올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왠지 바로누르기가 어려웠다. 살짝 울컥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끝인가.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의원면직 대장정의 시작.


지내온 십여 년간의 공직생활과 최근 몇 달간의 심경변화와 지금의 내 마음이 엉켜서 약간 복잡한 심정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 쳤다.(아니 왜?)


보내기 버튼 클릭.


갔다. 가버렸다. 메시지가 가버렸다.


담당자가 읽기 전까지는 회수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쿵쾅대던 심장소리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갑자기 찾아온 마음의 고요.

잠깐 사이에 오고 간 감정들이 격하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자꾸 조바심 내며 회신을 기다렸다. 짝사랑 상대에게 문자 하나 보내놓고 답문 오나 안 오나 오매불망 기다렸던 앳된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내가 못 본 건가.'

메신저 쪽지함을 열어보고.

'그가 못 봤나.'

수신확인해보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안 읽었네. -_-;;;'


몇 번을 반복했다.


잊자. 이미 떠난 메시지.

돌이킬 수 없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의원면직에 대한 내 의지.


메시지를 보낸 지 한 시간 반인지, 두 시간 만에 회신이 왔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의원면직은 보안서약서와 사직서를 작성하셔서
공문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보내주신 의원면직 신청공문을 접수하고
감사원, 경찰서, 감사관에 결격여부를
조회하는 기간이 있어 30일 정도 소요될 수 있습니다.


담백하다.

왜 퇴직을 하는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고.

왜 정기인사 때가 아닌 시기에 애매하게 관둬서 인사담당자를 피곤하게 하느냐는 원망도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다. (실제로는 원망했을지언정)


6급 승진하면서 타 지역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에 지금 지역교육청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퇴직하려는 나에게는 아주 고마운 상황이다.

기존 지역에서는 7년 이상 근무해서 지역교육청에 아는 사람이 많고, 인사담당자도 안면이 있어서 이렇게 아무 감정 없이 면직이야기를 나누지못했을텐데...

타지역발령이 나에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 순간이었다.



이제 시작이다. 의원면직일까지의 멀고 먼 길.


* 인사담당자에게 의원면직 의사표현

* 교장선생님께 의원면직 말씀드리기

* 행정실 직원들에게 의원면직 말하기

* 사직서 공문 제출

* 회신공문 기다리기 (한달 간 학교에서 눈총을 받아야겠지ㅠ)

* 퇴직수당신청, 퇴직연금 신청

* 맞춤형 복지비 환불해야 할 듯

* 업무인수인계


다 쓰고 나니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너무 큰 산처럼 느껴지는 건 '교장선생님께 말하기' 단계 때문인 것 같다.


엄청 뭐라고 할 텐데.. 엄청 화낼 텐데.. 그럴 거면 왜 7월에 발령 나서 왔냐 할 텐데..

왜 그렇게 무책임하냐고 할 텐데...


어쩔 수 없다.


들을 수 있는 만큼 듣고 못 듣겠으면 귀를 닫아야지...


내가 휴가를 쓴대, 휴직을 한대? 그만두겠다는데 본인이 어쩌실꺼야.

내가 당장 내일부터 안 나간다는 것도 아니고 절차대로 처리하고 나간다는데 뭐.

내가 7월에 이 학교로 오겠다고 사정해서 오게 된 것도 아니고.

어쩌라고. 배째라고.

당당하게 나가야겠다.


지금은 너무 쫄려죽겠네.


인사담당자와의 채팅이 끝나고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인사담당자한테 10.1일자로 퇴직하겠다고 얘기했어.
담주에 신청공문 보낸다고 했어.
교장한텐 담주에 얘기하려고.


연말까지 버텨보기로 했었는데 지금 학교에서 여러 가지 불만이 생겨 내 맘대로 계획을 바꿔버렸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일방적으로 통보한 셈이다. 카톡 보내면서 왜인지 또 울컥했다.



잘했오. 여보.
그동안 마음고생많았옹.
잘될꺼야^^♡


음?

너무 좋은 남편처럼 답이 왔는데...?

처음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남편의 반응을 아직도 못 잊겠는데...? ;;;

(내가 공무원이라 나랑 결혼했던 거지? 그랬던 거지? 하면서 한동안 남편을 추궁할 수밖에 없었던 남편의 반응)


지금이라도 내 결정을 지지해 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끝까지 반대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막판에 그냥 포기한 것 같긴 하지만, 현명한 남편이다. 남편이 끝까지 내 퇴직을 반대했다면 남편과 결혼생활을 유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퇴직에 대한 내 의지는 그 정도였다.


공무원은 그 정도 의지는 되어야 그만둘 수 있는 건가보다. ㅜㅜ

아, 너무 고되다.


사기업 다니는 남편이 나의 이 지난한 퇴직과정을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힘들 일이야? 그냥 가서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결정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야?"


남편님아.

사기업 다니는 사람들은 퇴직도 이직도 쉬운 일인지 모르겠지만 공무원은 한번 들어가면 마지막 끝에 가야 나온다고 생각하는 집단이야. 공무원은 정년퇴직, 명예퇴직 아니면 '퇴직'이라는 이름도 안 붙여주는 곳이라오. 나는 퇴직이 아니라 면직하는 거야.

의.원.면.직.


면직: 공무원관계를 소멸시키는 행위
의원면직: 본인의 의사에 의한 사직


이제 정말 엎질러진 물이다.

다시 담지 못한다.

담을 생각도 없다.

한 단계씩 미션클리어하고 나아가야 한다.


이제 교장님께 말하자.


202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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